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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화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언론에서 뉴스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드는 사례이다. 즉 평범한 이야기보다는 특이한 이야기가 기사화되기 더욱 적합하다는 말이다. 영화의 경우에는 어떨까? 오랜 고심 없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비록 그 배경은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하더라도 작품 속엔 반드시 특별한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에는 특별한 사건도 갈등도 없다. 소소한 일상적인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 모든 일들은 순리대로 잘 마무리 지어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마음이 아린 듯 따뜻해지기도 하는가 하면,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고독과 사색에 잠기게 된다. 지극히 통속적인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이면의 고귀함을 표현하는 데에 오즈 야스지로만큼 탁월한 감독은 없을 것이다. 오늘은 그의 대표작인 1949년 작 만춘(晩春)을 만나보자.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외동딸 노리코는 혼기가 꽉 찬 노처녀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가족인 만큼 어느새 서로가 편해진 두 부녀는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나름의 걱정이 가득하다. 노리코는 동창회 소식을 들으면 매일같이 혼담과 출산에 관한 이야기만 가득하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언제나 관심이 많은 노리코지만 정작 자신의 혼사에는 한 발 빼는 태도를 취한다. 사실 노리코는 홀로 남을 아버지 걱정에 결혼을 꺼리고 있다. 말씀이 적고 까다로운 아버지, 집안일이라곤 모르시는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노리코는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닫고 지내다 보니, 정을 두었던 사람도 다른 이의 남편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노리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어느 날 노리코의 맞선과 아버지의 재혼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꺼내 놓는다.

아버지의 재혼 의사에 배신감과 실망감이 몰려온 노리코는 밀려드는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다. 갈등 끝에 맞선을 보게 된 노리코는 다행히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혼인 전날 밤, 노리코는 아버지와의 긴 대화를 통해 결혼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결혼해서 새로운 인생을 남편과 함께 만드는 거야. 그것은 아버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란다. 인간 역사의 순리라는 거지.

 사실 결혼하자마자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 행복은 너희 자신이 만들어 가는 거란다. 결혼 자체가 행복이 아니란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엮어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란다."

 오랜 시간 염원하던 딸의 결혼식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딸이 없는 빈집에 홀로 앉아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껍질 깎는 소리만 가득한 집 안. 순리대로 딸을 출가시켰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가득하다.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위해 떠나지 않으려는 딸의 이야기를 정제된 형식 안에 담은 이 작품 ‘만춘’은 오즈 야스지로 후기 영화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이후 작품들은 부부, 가족, 결혼을 주제로 세밀한 감정과 심리묘사를 절제된 화면과 형식미 속에 응축해 담아내고 있다.

 특히 배경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이는 감독답게, 이 작품에서도 결혼 전·후로 딸이 채우던 공간의 공백을 통해 순리에 따르기는 했지만 품 안의 자식으로 함께 살아온 익숙했던 지난날과의 작별을 고해야 하는 한 아버지, 한 인간의 고독이 가슴 저리게 묻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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