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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오늘날 인천시는 ‘비류 2000년의 꿈’과 ‘인천정명 600년의 과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도약하고 있다. 비류 백제가 미추홀을 수도로 선택했을 때부터 인천은 바다로의 진출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고구려와의 관계가 두절된 1천600여 년 전부터 ‘해양을 통한 중국과의 최초의 교류’가 인천 능허대를 통해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뱃길의 효시였던 인천은 그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중국과 일본으로 나아가 세계를 오가는 해양 관문이었다. 해양도시 인천은 인천의 꿈이었고 숙명이었던 셈이다.

 인천의 앞바다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개경과 한양이 만(灣)의 배후에 입지했던 관계로 일찍부터 해상의 교통과 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혜의 요새로 내·외적으로부터의 변란이 있을 때마다 수도 방위와 피난지로서 중요시되어 왔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현장이었고 오늘날에도 군사분계선이 만(灣)을 가로 지르고 있어 수도 방위상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지도를 보면 인천 앞바다 한가운데가 ‘경기만(京畿灣)’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영역을 살펴보면 인천과 경기 서쪽 한강의 입구를 중심으로 북쪽의 장산곶과 남쪽의 태안반도 사이의 반원형 만(灣)을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강화도를 비롯하여 영종도·영흥도·덕적군도·순위도·용호도와 그 밖의 수많은 섬들이 산재하여 서해의 다도해를 형성하고 있다.

 ‘만(灣)’이란 바다가 육지쪽으로 들어와 있는 형태로, 해안선이 오목하게 움푹 패인 곳을 국제법상의 만(灣)이라 한다. 영문 용어는 걸프(Gulf), 베이(bay) 등이 사용되지만 명확한 규정은 없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남해안의 다도해 해역이나 서해안에 많이 발달했지만, 그러나 정작 우리의 고지도(古地圖)에는 만(灣)을 지칭한 사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해양 지명으로서의 만(灣)의 등장은 근대 지도의 제작과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의 근대 지도 제작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시도되어 다음해 1898년부터 지도 제작의 측량을 담당하는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했다.

 그러나 측량기술의 도입이 늦어진 사이, 일본을 비롯한 외국 열강들은 첩보활동의 일환으로 해안을 중심으로 조선을 측량했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측량이 본격화되었는데 1895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차례 지리정보를 수집해 지도를 제작했다.

 인천 앞바다를 지칭하는 ‘경기만’이라는 해양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 일본인이 1905년에 제작한 조선지도에는 인천 앞바다가 ‘경성만(京城灣)’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성만으로의 표기가 이때 최초로 사용된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수도 서울을 인천 앞바다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리라 본다.

 경기만이 문헌 속에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강점기 대략 1930년대로 나타나는데, 그럼에도 1936년 7월 인천관측소는 이곳을 ‘경성만’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시기가 경성만에서 경기만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점이라 판단된다. 결국 지명이라는 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 시세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올해는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독립한 이래 1995년 인천광역시로 부상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그 사이 인천은 서울 부산에 이어 3대 도시로 성장했고, 세계 굴지의 공항과 항만을 갖춘 동북아의 중심지로서 또 경제자유구역으로 대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인천의 앞바다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과거 경기만의 대부분이 인천광역시의 영역이면, 이제는 경기만을 인천만이라 부르고 표기해야 하는 것이 객관적일뿐만 아니라 상식이다. 역사에서의 변화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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