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송도’에 가자고 하면 기사님의 반응은 한결같다.

 "구 송도인가요? 송도 신도시인가요?" 송도 신도시에 가려면 수인선 송도역에서 내려야 하냐며 묻는 서울 친구들도 있고, 송도시장과 송도초등학교는 당연히 송도신도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혼란은 인천에 두 군데의 송도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 사람들에게 송도라 함은 연수구 옥련동 일대 이른바 구 송도라 불리는 곳과 연수구 송도동 일대의 송도신도시를 말한다. 송도라는 이름을 우리말로 풀면 ‘솔섬’으로 아마도 소나무가 많이 분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일 게다.

그렇다면 구 송도나 송도신도시 주변으로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도를 찾아보니 송도라는 섬은 찾을 수 없다. 송도라는 이름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 ‘송도’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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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간행된 인천의 고지도나 읍지 자료에 ‘송도(松島)’라는 섬은 보이지 않는다. 청량산 서쪽으로 자그마한 섬 ‘아암도(兒岩島)’와 ‘소암도(小岩島)’가 있을 뿐이다. 아암도의 다른 이름이 송도라는 설도 있지만, 어느 자료에서나 아암도로 표기될 뿐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옥련동의 ‘능허대’가 원래 송도라는 섬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조선시대 지도에서 보이는 능허대의 모습은 육지와 붙어있는 바다로 돌출된 지형이다. 결국 송도라는 이름의 섬은 애초부터 없었던 셈이다.

 송도 해안가 어딘가에 송도라는 지명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송도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1990년대까지의 송도는 연수구 옥련동 일대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먼우금면 옥동(玉洞), 한진리(漢津里), 옹암리(甕岩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가 되었다.

그리고 1936년 10월 인천부의 제1차 부역확장 당시 부천군에 속해있던 옥련리가 인천부로 이관되면서 ‘송도정’이라는 행정지명이 붙게 되었다. 비로소 행정지명으로 송도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이 행정지명은 그 후 약 9년간 사용되다가 해방과 동시에 원래의 이름인 옥련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송도유원지

 일제강점기에 불과 9년 동안 붙어있던 지명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해방이후에도 ‘송도’와 관련된 이름이 어딘가에 활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송도유원지이다. 송도유원지 조성사업은 1926년부터 인천부의 시책사업으로 계획되었다.

 1923년 개장한 월미도 유원지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자 인천부는 바다에 면한 또 다른 유원지를 개발하여 인천을 관광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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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해동지도에 표기된 아암도
 이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33년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 인천부윤이 부임하면서 사업추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36년 3월 3일 유원지 개발과 운영을 담당할 송도유원주식회사 발기인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같은 해 4월 12일 인천공회당에서 송도유원주식회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자본금 200만 원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그 해 가을 청량산 아래 약 4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해수풀장, 보트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1937년 5월 송도유원지를 개장하였다.

 이듬해에는 놀이시설, 조탕, 호텔 등 본격적인 시설을 갖추고 개장 2년 만에 월미도유원지와 경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문을 닫았던 월미도유원지와 달리 송도유원지는 해방이후에도 인천을 대표하는 위락시설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61년 전국 최초의 국가지정 관광지로 승인받아 여름철이면 하루에 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서울 근교에 새로운 여름 휴양지가 속속 생겨나면서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2011년 74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문을 닫고야 말았다. 해방이후 송도정이 옥련동으로 바뀌었어도 변함없이 인기가 높았던 송도유원지 덕분에 송도라는 지명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 해수욕장에 붙은 ‘송도’라는 이름

 인천의 송도는 섬이 아니라 유원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왜 유원지의 이름에 송도라는 섬의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 전국에 ‘송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대략 12개로 마산, 여수, 보령 등 주로 서·남해안에 분포한다. 섬이 아니면서 ‘송도’라는 지명이 붙어있는 곳은 인천을 포함하여 부산, 포항 등 세 곳인데 그 곳에는 모두 송도라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있다.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 부산의 일본거류민들이 설립한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이다. 지금의 부산시 서구 진정산 동쪽 해변에 위치했던 송도해수욕장은 개장이후 부산 일대의 관광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포항의 송도해수욕장은 바다와 형산강 하류에 둘러싸인 ‘분도(分島)’라 불렸던 섬이다. 1911년 포항에 거주하던 일본인 지주 오오우치 치이로(大內治郞)가 모래사장만 있던 이곳에 방풍의 목적으로 소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울창한 송림이 형성되었다. 얼마 후 섬의 이름을 송도로 바꾼데 이어 1931년에는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다.

 인천, 부산, 포항은 모두 송도라는 섬이 없음에도 송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해수욕장이 있다는 점 외에도 세 곳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는 점, 해수욕장의 개발에 일본인들이 직접 관여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왜 이곳의 해수욕장에 ‘송도’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일까?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만 일대에 위치한 마츠시마(松島)는 일본 3경의 하나로 손 꼽히는 명승지이다. 마츠시마 만은 12㎞, 너비 5㎞에 달하며, 크고 작은 260여 개의 섬들이 적송과 해송에 뒤덮여 일본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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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신도시 조감도.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도시에 그들을 위한 해수욕장 등 위락시설을 만들면서 일본의 명승지 ‘송도’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은 아닐까? 마치 우리가 ‘금강’이라는 이름을 차용하듯이 말이다.

 1930년대 말 간행된 「경승의 인천」이라는 관광지도에 따르면 송도해수욕장 주변의 청량산을 ‘송도금강(松島金剛)’이라 표기하여, 아예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명승지의 이름을 붙여버렸다.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에게도 사랑받는 명소를 만들기 위한 염원을 담았던 것이려니 생각하면서도 마츠시마와 금강산의 조합이라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결국 ‘송도’라는 이름은 당시 새로 생겨나는 유원지의 관광 마케팅을 위해 붙여진 셈이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이름을 별다른 고민없이 사용해 왔던 것이다.

 # 바다에 세워진 해상 신도시

 대부분 알고 있듯이 송도신도시는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공간이다. 이곳에는 처음 계획단계부터 송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1988년 4월 이재창 인천시장은 대통령 초도순시 보고에서 2011년까지 송도 앞바다를 매립하여 1천900만 평의 해상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사업명칭은 ‘송도해상신도시 건설사업’으로 굳혀졌고, 1994년 9월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인 매립에 들어갔다. 2003년 8월 영종, 청라와 함께 인천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송도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기반시설 공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2006년 3월 송도동이라는 법정동을 신설하였다. 당시 송도가 일본식 지명이므로 동명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송도 앞바다에 세워질 해상 신도시라는 의미에서 별 생각 없이 붙인 이름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천사람들에게 송도신도시라는 명칭이 고착화 되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아니면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었을 당시, 아니면 최소한 법정동을 신설할 때만이라도 지명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논의과정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이나 역사성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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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1929년부터 4년간 인천부윤을 지냈던 마쯔시마 키요시(松島淸)의 성이 송도이며,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해전에 참전했던 일본 해군 2등 순양함의 이름도 송도함(松島艦)이다. 인천에 송도라는 섬은 없지만, 그 흔적들은 유독 일본과 관련이 깊다.

그러기에 인천이 자랑하는 국제도시의 이름에 송도라는 지명이 붙어있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이름을 일순간에 바꾸기도 곤란한 일이다. 다만 인천 사람이라면 적어도 송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송도 임해주택 분양 포스터

1937년 10월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청량산 기슭에 임해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입주자를 모집했던 분양포스터이다. 모두 70호를 분양하며 1호의 면적은 150평부터, 가격은 평당 3원에서 15원까지로 부지공사비를 할인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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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유원주식회사는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 인천부윤이 대표이사를 맡고 인천부의 자금이 투입된 공영회사로 송도유원지를 해수욕장 등의 위락시설 뿐 아니라 골프장, 별장 등을 갖춘 종합휴양지로 개발시키고자 하였다.

 이 회사의 상무 후지모토 겐이치(藤本源市)가 「경성잡필」1936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당시 인천부는 부정목표를 무역, 공업, 관광으로 설정하였고, 관광 인천을 선도하는 중심축을 송도유원지에 두었다.

또 그는 송도유원지에서 문학산에 이르는 480만 평의 부지를 국제관광지구로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한편, 해수풀장을 중심으로 하는 임해유원지와 청량산 기슭의 임해별장지 및 임해주택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이름은 주식회사이지만 사업자체는 다분히 공공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언급했다.

 송도를 종합휴양지로 개발하기 위해서 인천부에서는 수인선 구간에 송도역을 설치해 줄 것을 철도의 건설과 운영을 담당했던 경동철도주식회사에 요청했다.

 1937년 7월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송도유원지는 월미도 못지않은 인천 사람들의 위락시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는 1937년 10월 청량산 기슭의 임해주택지 1만여 평을, 이듬해 4월에는 별장부지 3만 평을 분양하였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청량산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케이블카의 설치와 수인선 송도역과 연결되는 전차 부설도 계획하고 있었으니 송도를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휴양지로 만들려는 인천부의 야심찬 계획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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