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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지어낸 것인지, 실제 원전이 있는 것인지, 재미난 묘비명(墓碑銘)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 있다. 어느 으리으리한 묘지 앞에 멋진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대한 정치가, 청렴결백한 남자, 여기에 잠들다.’ 길을 가던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원, 세상에! 관 하나에다 두 사람을 묻는 풍습이라니…."

 이야기의 품이 서양의 유머일 듯한데, 어쨌거나 정치가를 차갑게 풍자하고 있다. 정치가에 대해서는 여기나 서양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냉소의 대상으로 삼는 것 같다.

 묘비명은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묘비에 명문이나 시문을 새긴 것을 이른다. 대체로 본인이 생전에 남긴 것이다. 반드시 ‘슬픔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과 표현 방식’이 있다. 또 ‘묘비명에는 인생, 사랑, 행복, 자유, 정의, 예술, 명예, 성공. 수신, 희망 등 그 사람의 삶과 추구했던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앞의 유머는 과연 어떤 정치가가 남겼을까.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워낙 유명한 대로 재미있고 스스로 냉소적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다."도 그런 류라 할 수 있다.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은 아주 시적이다. 정말 이렇게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는 과연 공산주의 창시자답다. 카뮈의 것은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라고 하는데 실존주의자 면모 그대로다.

그렇다면 우리 쪽은 예부터 죽음이나 묘비명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옛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무화(無化)를 극복하려면, 영원히 썩지 않을 세 가지를 이루라고 했다. 덕(德)과 공(功)과 언(言), 그 셋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이루어야 이름이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고 했다." 심경호(沈慶昊)가 쓴 『내면기행』 서문의 한 구절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옛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올 자기 존재의 무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묘표(墓表)와 묘지(墓誌)를 적고 자기를 스스로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지었다는 것이다. 후한 때부터는 생전에 자신이 들어갈 무덤을 스스로 만드는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옛사람들이라 해도 존재의 무화를 어찌 초연히 극복할 수 있겠는가. "도연명은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自挽) 시를 지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무엇이 한스러운가, 술 마신 것이 흡족하지 못했음이라네.’라고 했다. 이 말을 보면 그가 죽음의 문제로부터 초연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으랴."

 결국 묘표와 묘지와 만시를 짓는 행위는 ‘자기 존재의 종말에 대한 아쉬움, 슬픔, 두려움의 인간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묘표와 묘지와 만시 속에서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고, 부조리에 대한 격한 감정을 간결한 언어로 응축시켜 남기기도 했으며,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너털웃음을 웃기도 하고, 말래야 말 수 없는 자기 양심을 발로하기도" 한 것이다.

 카뮈의 묘표가 가장 우리 옛사람들의 것과 비슷한데, 이 역시도 ‘자기 존재의 종말에 대한 아쉬움, 슬픔, 두려움’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는 자동차 사고로 비명에 죽었지만. 스님도 묘비명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에이, 괜히 왔다"는 중광의 것이 버나드 쇼의 묘비명과 썩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끄제 추석날에는 대부분 성묘를 다녀왔을 것이다.

차례 상을 차리고 묘비에 적힌 조상의 함자(銜字)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을 것이다. 묘비를 쓸고 있는 손길과 함께 조상에 대한 흠모와…, 그리고 얼핏 죽음에 대해 짧게나마 생각해 보았을지 모른다. 죽음에 대처하기는 그 누구도 어렵다. 오늘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루하루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정치가는 정치가의 ‘길’ 그대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의 ‘길’ 그대로, 교사는 교사의 ‘길’ 그대로,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음식을 나르는 사람의 ‘길’ 그대로 가야 한다.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요 죽음에 대처하는 길이다. 죽음은 어느 새 누구나의 코앞에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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