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10일 ‘경기교육신보’를 시작으로 올해 창사 40주년을 맞은 기호일보가 ‘인천교육 40년사’를 되짚어본다.

교육신보로 첫발을 뗀 만큼 본보는 지금까지 교육계의 실상 또한 독자들에게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인천 교육사를 되돌아보는 한편, 과거를 교훈 삼아 더 나은 인천 교육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경기교육신보가 창간된 1975년 당시 인천은 고교평준화 정책을 도입했다.



앞선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시작된 고교평준화 정책은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각 고등학교·도시 간 학력차를 줄이려는 취지로 시행됐다. 인천은 대구·광주와 함께 서울·부산 시행 1년 뒤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이어 인천은 ‘제1·2차 교육발전 계획’과 ‘1976~1981년 6개년 인천시 교육발전 계획’을 통해 인천지역 학생들의 학력 향상과 학습 내용의 질적인 개선을 도모했다.

특히 인천 교육계는 초등학교 내실화, 과학·기술교육 확대, 사회교육 확충 등으로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통한 지역 간 교육 균형 발전을 꾀했다.
▲ 1976년 교육청 연합체육대회


또한 연구 활동 추진·강화, 장학 지도방법 개선 등을 통해 교수·학습의 질적 향상을 위해 힘썼다.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 및 인천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천 교육이 경기도교육위원회의 관할에서 분리·독립되면서 인천에는 문화교육부 직할인 ‘인천직할시 교육위원회’가 탄생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면서부터 우수 인재 유출로 인한 속앓이가 시작되기도 했다.

가용현 인천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은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을 당시가 우수 인재 유입에 더 수월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지난 1970년 경기도 일산에서 첫 교편을 잡은 뒤 인천시교육청 장학사·장학관, 인천고 교장, 인천교육위원회 위원, 제5대 인천교육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가용현 이사장은 "경기도에 속해 있었을 당시 인천지역은 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라 경기도 내에서 교사에 대한 지원이 좋은 편이었다"며 "학생들도 경기도에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인천으로 많이 들어와 인천 학력이 매우 높았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직할시로 분리된 이후에는 인천지역 내에서만 학생들이 돌기 때문에 그만큼 우수 학생들의 분포도가 떨어졌고, 그것이 학력으로 이어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러한 우려에도 인천은 1981년 7월 1일 당시 인천고 교장이었던 김천홍 초대 인천시교육감을 중심으로, 김순제·배경숙·이태환·이병철·최원철·김찬회 의원 등이 교육위원으로 임명돼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 인천시교육청사에서 역사적인 출범(2국 5과 21계)을 알렸다.

▲ 1980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 추첨
이듬해부터 인천은 본격적으로 시민을 위한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1982년 5월 18일 부평도서관(열람석 544석)을 시작으로 1983년 9월 30일 인천중앙도서관(1천415석), 1988년 10월 20일 화도진도서관(1천145석) 등이 차례로 개관했다.

본보는 1988년 7월 20일 기호신문(11월 28일 기호일보로 변경)으로 변화를 주며 보다 더 보편적이고 다양한 범위의 인천교육 현실에 대해 다뤘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신홍균 교육감이 새롭게 취임했고, 1991년 3월 8일에는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이 발효됨에 따라 기존 인천시교육위원회는 심의·의결기관인 교육위원회와 집행기관인 인천시교육청으로 분리됐다.
또한 1993년 8월 18일에는 기존 ‘2국 5과 21계’에서 ‘3국 3담당관 10과 35계’로 개편됐으며 부교육감제가 신설됐다.

이에 대해 가용현 이사장은 "1대에서 5대까지는 교육예산 심의나 교육 전반에 대한 심층적 논의가 자체적으로 운영이 잘 됐지만 조금씩 정치적 개입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며 "6대부터는 암묵적으로 인천시의회에 포함됐고 결국 7대에서는 아예 시의회로 흡수됐다"고 말했다.

이어 "교육은 정치와 별개로 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충분한 논의를 통해 교육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교육의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적다 보니 교육의 내부까지 들어다보는 안목이 부족해 현실과의 괴리가 생기는 등 우려스러운 부분들이 많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한편 1993년 6월 26일 인천시교육위원회는 유병세 제물포고 교장을 신임 교육감으로 선출하게 된다. 유병세 교육감은 민선 교육위원이 선출한 첫 교육감으로 ‘민선 초대 교육감’으로 알려져 있다.
▲ 1990년 마곡초 운동회 모습


이후 인천직할시는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됐고, 그해 3월 1일부터 강화군·옹진군·김포군 검단면 일원을 인천시로 통합했다.

이와 함께 통합된 지역의 유치원 43개, 초등학교 45개, 중학교 17개, 고등학교 11개 등 총 116개 학교가 시교육청으로 편입됐다.

1998년 8월 17일에는 시교육청이 지방교육자치 법률에 따라 학교운영위원(각 학교 대표 1인)과 교원단체 대표들로 선거인단을 꾸려 4개 권역별로 교육위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듬해인 1999년 1월 1일 시교육청은 경제 위기로 인해 행정기구를 개편하게 됐으며, 기존 ‘3국 3담당관 10과’를 ‘2국 3담당관 8과’로 축소했다.

당시 유병세 교육감은 1993년부터 2001년 6월까지 8년의 재임 기간 동안 인천교육의 지표를 ‘21세기를 선도하는 창의적 인간 육성’을 공식화했다. 이를 위해 ▶도덕적 품성 교육 ▶적성 능력 계발 ▶정보화·국제화 사회 대비 교육 ▶자율적 열린 학교 운영 ▶미래지향적 교육환경 조성 등을 시행했다.

2001년 7월부터는 나근형 교육감이 제7대 인천시교육감으로 선출돼 인천 교육을 이끌었다. 나 교육감은 2010년 7월 제8대 인천시교육감으로 재선되는 등 13년 동안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나근형 교육감은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적 인간 육성’을 교육지표로 삼고 ▶인성교육 강화 ▶다양한 창의성 교육 ▶평생학습 능력 신장 ▶학습환경 향상 등을 통한 인천 교육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어 2014년 7월에는 인천지역 최초의 진보교육감인 이청연 교육감이 취임했다. 이 교육감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인천시교육위원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교육위원회는 최용덕 위원장을 비롯해 박종우·이강호·박승희·이영환·제갈원영 의원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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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연 인천시교육감이 ‘찾아가는 교육감과의 간담회’에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교육감은 취임사에서 "아이들의 표정에서 인천교육의 미래를 찾겠다"며 "경청하는 교육감으로 살아 숨 쉬는 교실에서 인천교육이 나아갈 길에 대한 답을 찾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시교육청은 지난해 ‘인천형 혁신학교’ 10개교를 발표했고, 현재 ‘행복배움학교’로 명칭을 변경해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지난 9월에는 ‘행복배움학교 학부모 네트워크’를 신설해 학부모들과 교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행복배움학교 네트워크는 앞으로 정기 모임을 통해 의견 수렴, 정책 제안, 행복배움학교 학부모교육 강사단 육성, 학교 탐방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그러나 중학교 무상급식, 초등학교 스포츠강사 해임, 각 도시별 학력 격차 및 과밀학급 문제 등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용현 이사장은 "과거와 달리 요즘은 학교 문화가 자유화·민주화되면서 학생들과 기성세대(교사)와의 거리가 생긴 느낌"이라며 "이제는 교육이 ‘가르침’보다 ‘생활지도’에 전념해야 하는 현실을 비롯해 사교육 및 교권 하락 문제도 모두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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