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대는 행정구역이 인천직할시로 분할되기 전 경기도 인천시로 있을 때였지만,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우수한 인재·학교시설·교사들이 인천에 집중돼 ‘교육하면 인천’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최고의 교육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기호일보 전신인 ‘경기교육신보’는 당시 교육자 출신이 창간한 언론사로, 비난과 군림을 일삼는 다른 언론사와는 달리 교육의 폭넓은 시각으로 인천교육 대변은 물론 사회 변화를 주도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신문사로 기억하고 있어요."

오는 10일이면 본보가 창사 40주년을 맞는다. 본보는 지난 1975년 10월 10일 ‘경기교육신보’로 문을 연 후 지금(기호일보)까지 경기·인천 교육과 교류·상생·견제로 연을 맺어 정론직필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에 따라 본보는 창사 4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교육계에 입문해 인천교육 토착화와 변화를 이끈 ‘인천교육의 산증인’으로,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인천교육을 위해 봉사를 다하고 있는 이성구(83)인천교육삼락회 자문위원을 만났다.

현재 인천지역 교육자 모임인 ‘인천교육삼락회’ 자문위원을 비롯해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이사장, 인천무궁화포럼 고문 등을 맡고 있는 이 자문위원은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인 지난 1953년 3월 인천사범학교(경인교대 전신)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오류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으면서 교육계에 입문했다.

 이후 1961년 모교인 인천송림국민학교로 발령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인천교육과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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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5·16 쿠데타 등 암울한 시기에 교편을 잡고 ‘사회와 교육’이라는 큰 장벽과 싸우면서도 이 자문위원은 올바른 교육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자는 일념으로 분필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는 자신이 설립하는데 큰 힘을 보탠 인천교육과학연구원장으로 1997년 교육계를 떠날 때까지 교감·교장은 물론 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남부교육청 교육장, 시교육청 초등교육과장 등을 거치면서 인천교육의 초석을 다졌다.

 40여 년이라는 세월을 인천교육과 싸운 그는 정든 교육계를 떠난 이후인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인천시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그 사이 3대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50여 년간 인천교육 발전에 큰 힘을 보탠 이 자문위원은 다시 10년 동안 인천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자나 깨나 인천만을 생각하는 ‘인천 터줏대감’으로 불릴 정도로 인천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인천교육 현장을 떠난 이 자문위원은 지역사회 봉사활동 10년 동안 경기도 관할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분할된 시점이라 그 당시 인천의 몇몇 지식인들과 인천뿌리 찾기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당시 그는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인천의 모든 자료들을 모아 인천의 정체성 찾기와 자랑스러운 인천을 알리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등 ‘인천의 얼’을 지역 곳곳에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 자문위원은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교육계 교감·교장 연수는 물론 각 구청 및 동사무소 배포·홍보, 교재로 제작해 인천의 모든 학교에 배부했고, 테이프로도 제작해 여관·택시기사 등을 통해서 인천의 얼을 알렸다.

 이렇게 인천의 교육은 물론 인천뿌리까지 찾는데 동참한 그는 시민운동인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를 창설,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인천의 뿌리 찾기, 애향심 기르기, 역사적 전통 살리기 등을 이어 가고 있다.

 지금은 비록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인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부탁하면, 단 한 번도 머뭇거림 없이 "인천을 사랑하는 마음에 모든 교육이 시작되고, 또 인천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힘을 주며 몇 번이고 강조한다.

 그런 그에게 올해 창사 40년이 된 ‘경기교육신보’에 대해 살짝 물었더니,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는 창간 당시를 회상했다.

 "1970년대 언론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거머쥔 집단으로 국민들에게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기억을 더듬은 이 자문위원은 "발행인인 서강훈 회장은 당시 교육자를 지낸 한 사람으로 교육에 열정·소신·철학·사랑 등이 투철했다"며 "그런 정신을 바탕으로 ‘경기교육신보’를 창간한 후 교육이 근대화의 발전의 뿌리로 정착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고 동시에 교육의 문제를 꼬집어 바로 잡는 등 인천·경기교육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 만큼 처음에 나올 때 매우 관심이 많았다"며 "이전에 학교 교육이 언론에 억압을 받았던 시절과는 달리 학교 교육을 대변하는 언론이 나오면서 인천·경기교육이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 자문위원은 "기호일보 역시 경기교육신보가 뿌리인 만큼 다른 언론사보다 견고하다고 본다"며 "지금 40년이 지났지만, 앞으로 40년 후에는 신문과 방송이 함께하는 종합언론매체로 뻗어갔으면 좋겠다"는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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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년 동안 이어져온 언론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 그는 인천교육에 대한 궁금증에서는 자세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경기도 인천시 시절 인천교육은 전성기였다"는 이 자문위원은 "경기도에서 인천을 볼 때 인천이 개항되면서 인천이 경기도의 얼굴이었고, 그런 만큼 인천에 인재와 자본, 기술 등이 모두 집결했다"면서 "교육 역시 좋은 교사·학생·시설들이 다 모이면서 가히 인천교육의 전성기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학생들 역시 경기도, 충청도, 개성 등지에서 좋은 인재들이 인천으로 몰리면서 어떤 고교는 한 학년에 50명 이상이 서울대로 진학하는 등 전국의 인재들이 다 모이는 곳이 인천이었다"고 자랑했다.

 특히 이 자문위원은 인천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지금 인천은 대한민국의 얼굴이다"라고 자부한 그는 "이제 인천이 전 세계 문물들의 유입도시, 중국과의 교류 최적지 등으로 평을 받고 있는 만큼 분명 우수한 교육기관들도 인천에 몰릴 것"이라며 "그 예가 지금 송도국제도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인천교육 문제에 대해 "인천교육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가 다 똑같을 것이다"라는 이 자문위원은 "현재 교육은 분명 변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면서 "하지만 교육만 변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사회·역사 등과 함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지금 인천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인정신, ‘나는 인천사람’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교육 역시 이런 주인 정신과 긍지를 바탕으로 한 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며 "결국 앞으로의 인천교육은 ‘인간교육을 제일 잘하는 도시’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가슴 속에 있는 작은 바람도 말해줬다.

 끝으로 이 자문위원은 교육과 언론은 서로가 함께 사회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사회 잘못을 파헤쳐 국민들에게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 언론들이 많다"고 말한 그는 "언론과 교육의 근본 취지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은 똑같다"며 "이제 교육을 언론이 비평만 하지 말고 지도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은 이 사회 그 어떤 분야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매체로, 그 정보를 우리 교육쪽으로 많이 할애해 언론과 교육이 공생하면서 사회변화의 주역이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이성구 인천교육삼락회 자문위원 프로필

1953년 3월 국립인천사범학교 졸

1953~1990년 서울·인천·경기도에서 교직생활

1990년 9월 인천남부교육구청 교육장

1996년 9월 인천시교육과학연구원 원장

2000년 9월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2003년 5월 (사)인천사랑시민협의회 이사장

#저서

시청각매체 활용의 실체

사랑하며 가르치며

뿌리 깊은 개척정신

인천사랑운동

글=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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