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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철 작 ‘화성전도’.
수원부는 1793년 1월에 화성(華城)으로 승격했으며, 화성이라는 현판은 어필(御筆)로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이듬해인 1794년 1월, 왕은 팔달산에 올라 화성의 축성에 대해 말하기를 성을 좁고 길게 만들어 마치 버들잎과 같게 하라고 했다.

 이미 화성의 모습은 왕인 정조의 머릿속에 선연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곧 장헌세자를 옮겨서 모신 현륭원에 참배할 때 머물 행궁인 화성행궁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홍도는 이미 1773년에 영조의 어진과 함께 당시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으며, 왕세자가 왕으로 즉위한 뒤 5년이 지난 1781년에는 내로라 하는 화사였던 한종유나 신한평과 같은 인물들과 함께 참여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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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작 ‘한정품국’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그 후, 1791년에 다시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일에 참여했고 이에 충북 연풍현감에 제수됐다가 3년 만인 1795년에 파직되어 돌아 왔다. 어쩌면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첩( 園幸乙卯整理儀軌)》의 제 1면에 보이는〈화성행궁도(華城行宮圖)〉는 이맘 때 그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앞에 말했듯 왕의 머릿속에는 완공된 화성 일대의 모든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1795년 1월 왕이 한창 공사 중인 화성을 찾았을 때 김홍도도 동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성행궁도〉는 행궁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에 대한 왕의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으며, 행궁과 함께 지어지고 있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또한 김홍도가 그렸을 것으로 회자되는 까닭 또한 그에 대한 왕의 무한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정조는 화성이 축성되고 난 후, 화성의 아름다움을 봄가을로 각각 8경씩 16경으로 노래했다. 각각 춘팔경(春八景)ㆍ추팔경(秋八景)으로 나뉜 그것들 중 선 춘팔경부터 살피면 이렇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화산의 정경(花山瑞靄)ㆍ맑은 날 물안개 낀 수원천의 풍경(柳川晴烟)ㆍ꽃놀이가 한창인 매향교(午橋尋花)ㆍ뽕나무 숲 아름다운 관길야(吉野觀桑)ㆍ향음 주례가 행해지는 신풍루 광경(新豊社酒)ㆍ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대유평의 들녘(大有農歌)ㆍ말들이 이리저리 뛰노는 영화역의 풍경(華郵散駒)ㆍ연꽃 사이로 물새가 떠다니는 연못 정경(荷汀泛收)이다.

또 가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추팔경은 이렇다. 흰 비단을 펼친 듯, 물살이 장쾌하게 쏟아지는 화홍문의 경관 (虹渚素練)ㆍ만석거 주변에 누렇게 익은 벼들의 황금 물결 같은 모양(石渠黃雲)ㆍ맑은 하늘 달 밝은 가을밤의 용연 풍경(龍淵霽月)ㆍ저녁볕이 찬란하게 비치는 구암의 경치(龜巖返照)ㆍ가을 사냥이 한창인 화서문 밖의 풍경(西城羽獵)ㆍ활쏘기가 벌어진 동장대 정경(東臺畵鵠) ㆍ미로한정에서 국화꽃을 앞에 놓고 감상하는 정경(閒亭品菊)ㆍ화양루에서 늦가을에 내리는 눈을 감상하는 정경(陽樓賞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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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의 봄’.《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이 열 여섯 가지 아름다운 모습 중 당시의 그림으로 남은 것은 아쉽게도 추팔경 중 박진감이 느껴지는 서성우렵과 고즈넉함이 돋보이는 한정품국 두 점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정은 미로한 정자를 말하는 것으로 행궁 안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그림들 또한 김홍도의 솜씨이다. 이만하면 김홍도를 왕의 남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며, 그는 정조의 모습은 물론 그가 꿈을 이루는 과정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람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

당시 내로라하는 많은 인재들이 현륭원과 화성 그리고 용주사를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책만 읽는 바보인 간서치(看書癡)로 소문난 형암 이덕무(1741~1793)는 용주사에 매달 16개의 주련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하면 화성을 축성하는데 있어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지혜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패기 또한 큰 도움이 됐다.

정약용은 기술적인 부분에서 기여를 해 축성 기간을 단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하면 좌상이었던 채제공은 공사 전체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정약용은 그의 문집에서 말하기를 ‘채 상국이 화성에 갔을 때마다 시를 지어 책 한 권이 다 되었는데 임금께서 그 시권을 달라고 하여 그 가운데 시 네 수를 화답하셨다’고 말한다. 그때 정조가 화답한 시 중 한 수는〈동장대에서 중추의 달을 구경하다(東將臺中秋玩月)〉가 있는데 이렇다.

화려한 망루와 성벽이 의기를 과시하여라 <畫櫓粉城意氣誇>

여기에 항상 오색구름 펼쳐진 걸 보노라 <此中常見五雲遮>

높은 누각은 우뚝 솟아 가을빛과 겨루고 <高樓直聳爭秋色>

오만 물상은 다 밝아서 달빛에 떠오르네 <萬象俱明泛月華>

경치는 유독 오늘 밤을 인해서 좋거니와 <景物偏從今夜好>

산천은 원래 사시의 아름다움이 있다오 <山川元有四時佳>

뜨락의 소나무는 더디 크는 게 무방하여라 <庭松不妨遲遲長>

상국의 집에 맑은 달 바퀴 길이 매어 놓으리 <長繫淸輪相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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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용길 작 ‘화성의 여름’
이뿐일까. 정조는 말하기를 "매번 원소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이르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서 멀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했었다. 이번 행행 때 미륵현 위에 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臺) 형태와 같은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라고 한다.

 곧, 화성에서 돌아가는 발길이 아쉬워 더디게 걷는다는 뜻의 지지대를 만들고 나자 채제공은 시를 한 수 지었다. 이에 정조가 화답하니 <지지대(遲遲臺)에서 화성을 바라보다(遲遲臺望見華城)>이다. 정약용 또한 정조가 지은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며(遲遲臺駐蹕)>라는 제목의 어제시에 화답을 하였는데 이렇다.

대 아래 푸른 실로 꾸민 임금 길 <臺下靑繩路>

아득히 화성으로 곧게 뻗었네 <遙遙直華城>

상서 구름 농부의 기대 맞추고 <瑞雲連野望>

이슬비는 임금의 심정 아는 듯 <零雨會宸情>

용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旖旎龍旗色>

의장대 피리 소리 퍼져나가네 <悠揚鳳管聲>

그 당시 군대 행렬 어제 일처럼 <戎衣如昨日>

상상하는 백성들 지금도 있어 <想像有遺氓>

이러니 화성은 정조와 그의 남자들이 글과 그림으로 더욱 빛을 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채제공은 화성을 둘러싸고 있는 곳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정조는 그의 시에 화답을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소장 학자인 정약용까지 그들 틈에서 시문을 뽐냈으니 화성8경인들 어떻고 화성16경인들 어땠겠는가.

그들에게 있어 화성은 굳이 아름다움을 그만큼의 숫자로 나누는 것 또한 무의미한 장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 생각에 화성은 8경이나 16경으로 나눠지지 않을 만큼 전체로 아름다운 장소로 보인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견지할 수 있는 최상의 마음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글=이지누 ‘경기 팔경과 구곡: 산·강·사람’ 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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