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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교수
영국 스코트랜드 출신의 앵거스 디턴(프린스턴大)교수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자 ‘불평등’이라는 단어가 주목 받고 있다.

한 국가가 경제성장을 하다 보면 불평등도 생길 수 있고 그것의 긍정적 효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윤택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 예로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에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보고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견뎌 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을 받고 나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나친 불평등은 공공서비스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디턴과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스 피케티(파리경제대 교수)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에 관하여 여러 가지 고찰을 해온 것은 배척하고 싶지만 늘 가까이 있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근원적 욕망을 채우며 불만 없이 살아왔지만, 사회를 조직하고부터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조건(부, 소유)이 불평등을 야기하였고, 불평등은 투쟁을, 투쟁은 국가를 낳았다고 보았다. 디턴 교수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아담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자원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런던과 파리를 비교하면서, 어느 도시에 사회 정의가 아무리 추상같이 세워져 있어도 생활자원이 풍부하지 않으면 범죄가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분업과 협업을 통해 생활자원을 풍족하게 생산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영국 하인이 아프리카 추장의 삶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각과는 달리 생활자원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만큼 풍족하게 있다 하더라도 불평등은 존재한다고 보았다.

소수가 생활자원을 독점할 경우다. 소수가 생산수단 독점과 화폐자본 축적에 의해서 공동체 구성원의 자립성을 파괴할 때 부자와 없는 자의 상호의존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내 자신을 위한 노동보다 타인을 위한 노동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노동을 가져가는 자들은 베짱이처럼 일하지 않고, 개미들에게 의존하면서도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열심히 노~오~력 할수록 베짱이의 배는 불러오고 개미의 허리는 더욱 가늘어질 뿐이다.

 가난한 ‘노예’는 생활 수단을 ‘주인’에게 의존하고, 부자인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다. 이 상호의존 관계에서 주인을 주인답게 만드는 것은 노예의 노동이며, 노예를 노예답게 만드는 것은 주인의 강한 내재적 힘이 아니라 주인이 갖고 있는 화폐(소유)라는 힘의 작동에 의해서다.

마르크스는 이런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소연하기보다는 노예 스스로 스파르타쿠스처럼 족쇄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짱이가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개미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많은 쥐들이 생존을 위하여 고양이의 목에 어떻게 방울을 달아야 할까 고민하는 곳에는 즐거움과 희망이 없다. 그런 곳을 쥐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가진 자의 거침없는 갑질, 승자독식, 구직난과 적은 임금, 은수저의 대물림이 희망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젊은이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를 ‘헬 조선’, ‘망한민국’, ‘지옥불반도’라고 부른다. 그들의 주장이 옳건 그르건 그들의 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헬 조선’도 그들이 살아갈 나라이기 때문이다.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이 나라에 무슨 해괴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 사이에 ‘과’가 아니라 절벽 같은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살기 힘들 때 일수록 마르크스의 유령은 하늘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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