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기 칼럼니스트/작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진을 찍고 우리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여행지인 베네치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어김없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려 포도주, 올리브유, 발삼식초, 올리브비누 등 물건을 한 보따리 샀다.

 세계 관광지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퍼져 있는 수많은 한국인 가게와 식당에는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도 있지만 대체로 바가지가 많고 국내에 들어와 포장을 뜯으면 작동되지 않거나 못 쓸 것들이 많다.

 ‘안 사야지’ 하면서도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운데다 이왕 선물은 사야하고 쇼핑하는 기분에 들떠서 자기도 모르게 덜컥덜컥 사게 된다. 키안티 포도주 두 병을 20유로에 샀는데 바로 얼마 안 가 휴게소 상점에서 똑같은 상표의 포도주가 4유로를 해 속이 상했다.

 우리는 별 세 개인 두칼레 호텔에서 일박한 뒤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들어갔다.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가 된 이유는 훈(흉노)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훈족은 기마민족으로 수전에 약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바다를 건너가 갯벌에 말뚝을 박고 집을 지었다. 처음 바다를 건너간 사람 몇몇이 갯벌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터를 다져 수상가옥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잇따른 전란으로 피난민들이 점점 많아지자 수상마을이 커지게 되면서 지금은 11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시 베네치아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수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배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도시다.

밀물이면 물길이 된다는 도로를 걸어서 카사노바가 갇혔다는 감옥과 대리석으로 만든 총독관저, 마르코 성당과 마르코 광장을 둘러보았다. 마르코 성당은 대리석으로 만든데다 벽화와 천장화를 온통 황금 모자이크로 치장해 장관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의 시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 성당으로 옮겨오는 장면이 성당 벽화에 그려져 있다.

마르코 성당은 유럽의 성당 중 유일하게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다. 황금 모자이크로 만든 비잔틴 돔은 악마적인 이슬람 양식이라 해서 교황이 금지한 양식이지만 베네치아가 교황청의 검은 돈까지 세탁해주는 돈줄이었기에 건축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황금에 얼마나 약한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예수의 말을 기록한 마가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이 황금으로 덮인 천장화를 찍느라고 야단이었다.

 산 마르코 광장을 지나 입으로 불어서 유리제품을 만드는 전통수공업 유리공방에 가서 마이스터의 유리병제조 시범을 보았다. 불가마에서 유리 젤을 꺼내 굳기 전에 불어서 속을 넓히고 틀에 넣어 무늬를 찍은 뒤 손잡이까지 멋지게 쭉 뽑아 유리병을 만들었다. 유리병보다 마이스터의 작업 그 자체가 명품 예술이었다.

 베네치아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S라인의 대수로를 유람선으로 투어하면서 좌우의 건축물들을 보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건축은 호텔 등급의 별처럼 네 잎 클로버의 수에 따라 품격과 가치가 정해진다.

최고 다섯 개의 클로버가 붙은 집을 찾기 위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괴테·나폴레옹·처칠·헤밍웨이·마릴린 몬로 등 유명 인사들이 머문 집들은 클로버가 네댓 개가 붙어 있었다. 나는 집 밑의 다리와 수로난간들을 유심히 보았다. ‘안개 낀 날 수로난간을 조심하라’

 베네치아 수로와 안개는 최윤의 동인문학상 수상작 ‘하나코는 없다’의 배경으로 소개되어 작가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내용은 이렇다. 남자 다섯과 여자 둘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 친구들이 만취한 채 하나코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쳤고 그 뒤로 하나코는 모임에서 사라졌다. 먼 훗날 하나코의 행방은 베네치아에서 성공한 의자 디자이너로 알려진다.

남자친구들은 하나코와 이런저런 루트로 연락을 취하지만 정작 하나코를 만나지는 않는다. 이야기 화자인 그도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까지 와서 하나코를 만나지 않고 돌아간다.

이 소설을 베네치아에서 떠올리니 우정과 사랑의 모호한 경계선, 수로처럼 얽힌 아슬아슬한 인간관계, 그 사이에서 받는 마음의 상처와 치유, 하나코의 정신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것이 여행의 진수이다. 우리는 미로와 같이 얽힌 베네치아의 수로를 나와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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