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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성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학교폭력과 인성교육이었다. 전자는 원인이고, 후자는 대안이다.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과 같은 시민단체가 생긴 것도 범국민적 시민운동이 필요할 만큼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방증한다.

 2011년 12월 20일 대구 모 중학교 2학년 권모 군이 학교폭력을 못 견디고 자살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후 유사한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학교폭력이 사회문제화 됐다.

 사회문제가 되려면 세 가지 구성요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여야 하고, 둘째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해야 하고, 셋째는 그 현상이 그 사회질서를 위협한다고 상당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인식해야 한다. 당시의 학교폭력 현상은 이 세 가지 구성요건을 가질 정도로 지속적이고,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중학생’ 인가? 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학교’에서 발생했는가? 다른 큰 사회 환경의 변화가 없었는데 왜 ‘그 때’ 발생했는가? 그 이유에 대한 가설로 여러 가지가 제기됐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의 하나가 이들이 소위 ‘IMF 키드(Kid)’라는 점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경제적 위기로 수많은 가정이 해체됐으며 그 시절 많은 어린 아이들이 가정에서 제대로 양육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불행한 세대들이 어른의 통제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사춘기 중학생이 되어 곪은 것이 터졌다는 가설이다. 이런 조짐은 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절부터 나타났다.

당시 많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요즘 아이들이 무서워졌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직 신체적으로 덜 성장해서 어느 정도 어른들이 통제할 수 있었지만 중학생이 되면 사춘기와 맞물려 이야기는 달라진다.

 또한 이 당시 대학입시 중심에서 특목고 입시중심으로 바뀌면서 중학생 사교육이 팽창했다. 대부분의 중학생들은 방과 후에 철저히 통제되는 학원에서 생활했으므로 상대적으로 느슨한 학교가 학교폭력의 주된 장소가 되었다.

 즉 학교폭력의 근본적 원인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일어난 장소가 학교인 까닭에 가장 부산스럽게 학교의 대책을 요구하였고, 학교에만 관심을 쏟았다. 질병의 원인을 근절하기 보다는 증상의 완화에만 많은 에너지를 쏟은 셈이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누가 폭력을 행사하겠는가? 오히려 가정폭력이 만연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대물림한다. 안타까운 것은 어느 누구도 가정교육을 잘 하자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정교육을 살리려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학교와 지역사회가 가만있을 수만은 없다. 학생들이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곳이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학교는 인성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아울러 지역사회도 힘을 보태어야 한다. 지역사회를 좀 더 넓게 개념화하면 우리 사회가 인성교육에 힘을 보태어야 할 텐데 그 대안이 ‘신문을 활용한 교육’이다. 신문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신문의 내용은 우리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인성 역시 인간의 사람됨을 의미한다면, 우리의 삶은 인성의 표현과 다름 아니다.

 신문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성이 실제 행동으로, 사건으로, 문제해결로, 감동으로, 사실로 드러나 있다. 신문은 인성이 열거된 화석화된 교과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어떤 원로 교육자는 "거실에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초등학생을 보면 온몸에 전율이 온다"고 고백한 바 있다. 미래의 지도자를 발견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이 앞으로 살아 갈 사회를 미리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성교육은 어려운 미적분 문제가 아니다. 아주 간단하다. 신문을 보면 된다.

거기에 논리·문제해결·의사결정·창의·판단·통찰·건강·생명·자연애·양심·진실·행복·겸손·공감·관용·배려·성실·신뢰·용기·자기통제·자아존중·정의·정직·조화·준법·책임·협동·자신감 등 온갖 인성의 향연이 펼쳐져 있고 자연스럽게 인성을 갖춘 시민으로 자라난다. 아이들은 ‘따라쟁이’다. 학습은 모방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문 보는 부모의 모습이 먼저 보여야 한다. 부모의 어깨 너머로 아이들의 인성이 자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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