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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현린 주필
지난 주말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가을 등산을 다녀왔다. 산마다 울긋불긋한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지는 단풍을 대신하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지가 어저께 같았는데 산에는 벌써 낙엽이 지고 마지막 잎사귀마저 가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절기상으로는 오늘이 소설(小雪)이다. 이 날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고 한다. 가을이 가고 본격 겨울이 시작됨을 예고하는 절기라 하겠다.

 하지만 이 달까지는 가을로 쳐주자.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가을도 꼭 한 주밖에 남지 않았다. 봄에 씨 뿌린 농부는 열심히 추수하여 보람을 찾고 있다. 하지만 봄에 씨 뿌리지 않은 농부는 가을이 되어도 거둘 것이 없다. 봄에 나서(春生) 여름에는 자라고(夏長), 가을에 거두어(秋收) 겨울에 저장(冬藏)한다. 이것이 사계(四季)의 법칙이다.

 아직 11월인데도 벌써 연말분위기다. 늘 그래 왔듯이 한해 마지막 달인 12월이 남았는데도 11월은 언제나처럼 차분히 올 한해를 정리하고 조용히 새해를 설계해야하는 달이기도 하다.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가을을 노래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가을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그는 <추야오수(秋野五首)> 중 제2수에서 "뜬구름 같은 덧없는 인생 이치 알기는 쉬워도, 한 물건 잘못된 것은 가르치기 어렵네/ 물이 깊으면 물고기들이 즐거워하고, 숲이 무성하면 새들이 돌아갈 것을 안다네/ 늙은 이 몸 가난과 질병을 달게 여기네만, 부귀영화에는 본래 시비가 따르는 법이라/ 가을바람 안석(安席)과 지팡이에 불어와도 이 산에서 나는 나물 싫어하지 않는다네."라고하여 찬바람 부는 가을을 피하지 않았다. 인생의 만추(晩秋)를 시로써 즐긴 것이다. 오히려 가을을 예찬하며 가을 들판에서 이렇게 가을 찬가를 불렀다.

 우리나라 많은 시인들도 가을을 노래했고 노래하고 있다. "이제 겨울이 왔나보다/ 북한강의 앙상한 나뭇가지위에 걸려있는 몇 수의 낙엽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 가기전의 마지막 춤사위/ 그 주렁주렁하던 녹색의 향연이/ 모든 맘을 다 비운 나무가 되어/ 앙상한 나뭇가지만 걸렸네/ 사람도 사계절의 마지막 겨울에 오면 모든 것을 다 벗으려한다/ 맘속의 짐들을 다 벗으려한다/ 애써 두꺼운 옷들은 끼워 입지만 맘속의 짐은 다 털으려한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다 털으려한다/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모든 맘을 다 비우는 것처럼/ 모두 다 모두 다 훌훌 털며 비우고 비우는 것처럼/ 권력 돈 명예가 더 허상이라고"

 며칠 전 필자의 한 문우(文友)인 시인 박태우 고려대 교수가 보내온 <흔들리는 낙엽>이라는 제하의 시다. 공감이 가는 시라 생각되기에 한번 인용해 봤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필자는 일전에 다녀온 독일 교육의 도시 하이델베르크가 떠오르곤 한다. 그곳에 가면 그다지 높지 않은 나지막한 산에 ‘철학자의 길’이 있다. 헤겔과 하이데커가 이 길을 걸으며 상념에 잠겼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에게도 문장을 떠 올리게 했던 그런 산책로다. 이 길은 지금도 필자가 이따금 가을을 회상하면서 걷곤 하는 상상속의 길이기도 하다.

 소인묵객(騷人墨客)과 철학자가 따로 없다. 가을 산에 들면 누구나 사색에 잠겨 시인이 되고 철인이 된다. 그곳에 가면 정쟁(政爭)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등산 인구 천만 시대다. 집을 나서면 나들길이고 산에 들면 둘레길이다. 너나없이 만추의 계절에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려는 시민들로 산은 북적이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 모두가 가을이 가기 전에 가 볼만한 산과 들이다.

 산은 그 산 소유주의 것이 아니다. 철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경탄할 줄 아는 등반자의 것이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지인들과 미처 다녀오지 못한 산행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을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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