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문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 사신으로 고려 개경으로 향하다 잠시 머문 섬을 "제비가 많이 날아다녀 자연도(紫燕島)라 불린다"고 기록했다. 그때 서긍이 방문한 섬이 바로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다.

 지금은 900여 년 전 하늘 위로 날아다녔던 제비 대신 하루 수백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고 있다. 오늘날 영종도는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국내외를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곳이지만, 과거에도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중국을 왕래하거나 서해바다를 오르내리자면 꼭 거쳐야만 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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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들이 머물렀던 섬

 1123년(인종 1년) 서긍은 고려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중국 양쯔강 하구의 명주(明州)에서 출발해 서해를 가로질러 흑산도에 도달한 뒤 연안을 따라 개경까지 올라갔다. 서긍이 여행했던 이 뱃길은 남선항로(南線航路)라 불리는 고려시대 중국을 잇는 항로 가운데 하나였다.

 사신 일행은 흑산도에 도착에 고려 영내에 들어온 뒤 군산의 고군산도와 태안의 마도를 들러 인천의 자연도에 정박했다. 자연도, 즉 지금의 영종도에서는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에서 환영의식을 받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와 중국을 오간 많은 사신의 사행(使行)길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남해를 따라 세곡을 싣고 개경으로 오는 조운선도 이곳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마도와 영흥도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배 여러 척이 발굴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영종진, 바다에서 왕실의 보장처를 지키다

 바닷길의 길목에 자리한 탓에 영종도는 조선후기 국방상의 이유로 주목을 받는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3개월간 강화로 피난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을 계기로 강화는 남한산성과 함께 유사시 왕실과 조정이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로 설정됐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강화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조선정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효종~숙종 년간에 강화도 해안을 따라 인천과 교동, 안산 등 다른 지방에 있던 군영(軍營)인 진과 보를 옮기거나 새롭게 설치했다.

 강화도 자체 방비를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경기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기는 등 수군체제를 개편했다. 그 일환으로 1656년(효종 7년) 경기도 남양(오늘날 안산)에 있던 수군진인 영종진(永宗鎭)을 자연도로 옮겼다. 영종진이 자연도로 이설된 뒤 섬의 이름은 영종도로 바뀌었다.

 영종진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도성으로 향하는 수로의 방비와 유사시 한양에서 월미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어가(御駕)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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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에 강화도 주변에 떠다니는 유빙으로 통진에서 갑곶을 거쳐 강화로 이동할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 월미도를 거쳐 강화로 입보하는 제2의 루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월미도에 행궁이 설치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편 영종진은 맡은 임무의 중요도를 고려해 1681년(숙종 7년) 수장의 직급을 수군만호(종4품)에서 수군첨사(종3품)로 올렸다가 1690년(숙종 16년) 영종방어영으로 승격시켜 상부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 준비되지 않은 이방인과의 만남

 영종진이 이 섬에 들어선 후 한동안 인천 앞바다는 평온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양이(洋夷), 즉 서양열강이 출현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됐다. 당시 인천 앞바다를 통과하는 뱃길은 한양 도성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교섭을 원하는 서구열강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 학살사건을 구실로 함대를 파견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영종도 앞 작약도와 강화도 동쪽 해안, 즉 염하를 거쳐 양화진까지 올라가면서 수로를 측량했고, 십수 일 뒤 2차로 함대를 이끌고 작약도 근처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북상해 강화부를 함락시켰다.

5년 뒤에는 미국 함대가 현재 영종대교가 있는 호도에 정박하면서 인천 연안의 수로를 측량했고, 이후 강화로 이동해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파괴했다.

 2차례의 양요에서 영종진은 서양함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책임의 방기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근대식 화포로 무장한 서양 함대를 당시의 수군 전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해로 탐색 명목으로 수교를 거부하는 조선을 침입한다. 1875년 9월 12일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한 운요호(雲揚號)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부근에 정박한 뒤 이노우에(井上良馨)함장과 수병들이 정찰을 위해 작은 배를 타고 초지돈대에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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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초지돈대에서 먼저 포격을 해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단정이 퇴각한 뒤 운요호가 직접 초지돈대를 공격해 2시간가량 교전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전투에서 큰 성과 없이 남하했고, 9월 23일 영종진에 포격을 가하고 상륙을 감행했다. 운요호가 영종진을 공격한 것은 염하를 따라 한양으로 북상하다 초지에서 저지당한 것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복전이었다.

 

단정을 나눠 타고 섬에 상륙한 일본군은 교전 끝에 영종진을 함락시켰다. 당시 전투에서 영종첨사 이민덕은 35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영종진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대포와 칼, 창, 병서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영종진이 불탄 다음 날 운요호는 인천을 떠나 9월 28일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영종첨사의 보고로 이양선이 침입한 사실을 알았지만 운요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배가 어느 나라 배인지 몰랐고, 영종진이 공격받은 사실을 안 것은 진이 함락된 지 이틀 뒤였다고 한다.

 # 영종진 그 이후

 그 후 영종진은 백운산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되면서 영종진의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게 됐고 변방의 군영으로 쇠락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영종진이 불탄 지 140년이 되는 오늘날, 이 섬에서 영종진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화염에 휩싸였던 영종진이 자리했던 구읍뱃터 부근의 얕은 구릉에는 십수 년 전만 해도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허물어진 채 남아 있었지만 지금 그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돼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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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밑으로 옮겨졌던 영종진터도 그 자리에 학교와 건물이 들어서 있어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제 영종진은 몇 권의 기록에서만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영종도 호적대장이 그 중 하나다. 이 책은 영종진이 함락되기 9년 전인 1867년 영종방어영에서 호구조사를 실시한 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을 지난해 복제해 온 것인데, 이 호적대장이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호적대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당시 영종진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내년 하반기 영종진이 있던 자리 인근에 영종역사관이 세워진다고 한다. 공항과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영종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로 상전벽해가 된 이 섬에서 영종진의 모습은 역사관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영종호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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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고종 4년) 영종방어영에서 호구조사를 시행한 후 그것을 모아 책으로 만든 일종의 호적대장이다. 책의 정식 명칭은 ‘동치육년정월 일영종방영금정묘식장적(同治六年正月 日永宗防營今丁卯式帳籍)’이다. 세로 57㎝, 가로 40.1㎝로 94면으로 이뤄져 있다.

 이 호구장적은 인하대 임학성 교수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확인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됐는데, 이 책이 일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복제한 이 책의 원본 표지는 붉은 색으로 염색한 삼베를 사용했고 내지는 닥나무 섬유를 사용해 만들었다.

 호구장적에는 당시 영종도의 영하면·전소면ㆍ후소면·용유면·삼목면 등 5개 지역에 거주한 주민들의 인적 사항이 상세하게 등재돼 있다 이에 따르면 1867년 당시 영종지역에는 908호 2천781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성씨는 김해김씨가 15%로 가장 많고 전주이씨, 광주이씨, 경주정씨, 인동장씨의 순으로 분포한다.

한편 오늘날 가구주에 해당하는 호수(戶首)의 직역은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무인인 한량(閑良)을 비롯해 군직이나 무인과 관련된 직역이 60%가량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이처럼 군직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은 것은 영종도가 수군진이 설치된 지역이라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2층 전시실에 전시돼 있는 이 호구장적은 1894년 갑오개혁 이전에 작성된 인천지역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한 예다. 또 도서지역, 특히 수군 군영이 설치된 도서지역의 호적대장이 전라도 청산도의 1876년도 호적대장과 함께 2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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