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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
사람은 내면에 동물적 수성(獸性)을 가두고 살아간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동물은 생식에의 본능, 먹이를 찾는 본능, 생존의 본능으로 산다. 동물들 사이의 투쟁은 이 본능의 충돌이다. 본능에 충실할수록 동물은 더욱 맹수의 위엄을 발한다. 동물은 영육(靈肉)을 하나로 뭉개서 현존의 조건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를 용인하고 그걸 발판 삼아 동물적 숭고함에 도달한다.

그러기에 동물은 내면이라는 심연(深淵)을 갖지 못한다. 동물은 곧 표면이 곧 심연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을 억압하고 양심을 기르기 시작한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그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이런 감옥에서 탈주할 수 있는 열쇠는 ‘윤리학’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에티카’다. 에티카를 함양하지 못할 때 인간은 동물의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곳에 푹 빠져 사는 인간은 동물원의 동물들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동물적일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며, 자기 자신을 실험기구로 사용해 본다는 점에서 동물과 차이가 난다고 「선악의 저편」에서 설명한다. 자칫하면 동물보다 몇 배 더 못한 짐승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이 충돌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에티카 국가’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퇴계(退溪)의 「성학십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퇴계는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함, 미워함, 욕심이라는 칠정(七情)을 버리고 사단(四端)이라는 인, 의, 예, 지로 인간의 본성을 환하게 비춰야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봤다.

퇴계는 이러한 것을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慾:만물을 만들어 내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을 없앤다)’이라고 했다. 마음의 본성이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서 인격을 도야해야 성인의 경지에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동물의 세계에 가까웠는지 조정을 떠나면서 선조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남기고 있다.

 지금도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동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힘의 위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와 권력을 쥔 자들이 특혜를 독점하고, 패배자인 루저들은 생존의 영도(零度)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는 한국 사회와 동물의 세계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인 차원에서도 힘있는 남자가 여자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다양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선생님이 학생에게 자행한 성폭력 뉴스가 언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부산의 모 여자고등학교에서 남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애 낳는 것밖에 더 있나. 공부 안 하려면 몸이나 팔아라"라는 폭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선생님이 여학생의 엉덩이, 가슴 등 신체의 일부를 만지기도 했다는 보도다. 필자가 살고 있는 고장의 어느 고위직 공무원은 성추행으로 정년을 몇 년 안 남기고 공직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의 삶에 욕정이 삶의 상수(常數)인 것 같다.

정부가 나서서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을 없애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오히려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처벌이 미약하거나 또는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힘이 있다고 믿거나, 의식이 동물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자이다.

 본능에 집착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식(Common Sense)’과 ‘에티카’를 함양해야 한다.

이것 이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은 화학적·물리적 거세(castration)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동물적 남성성을 순치(馴致)시키지 못하면 막돼먹은 ‘후레자식’이 되기 쉽다. 사회의 성숙도는 사람들이 얼마나 짐승 짓을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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