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jpg
시장에서 행상을 하는 사할린 한인
# 광복 그리고 좌절

 패망을 목전에 둔 일본인들은 소련군에 협조한다는 이유를 들어 가미시스카(현 레오니도보)에서 한인 17명을 학살하고, 미즈호(현 포자르스코예)에서 여성 3명과 6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한인 27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즈호 학살사건은 소련 당국이 조사해 사건의 전모와 살해 가담자들을 밝혀내 7명은 사형을, 11명은 10년형을 선고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위령비를 건립해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 한인들은 귀국의 희망을 품고 사할린 가장 남쪽의 코르사코프항구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봐야 했던 것은 가해자였던 일본인들의 귀국 모습이었다. 모국에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귀국하면 사할린에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한인들은 동토에서 기약 없는 타향살이를 지속해야 했다.

 사할린 한인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 한인들의 체제 적응을 위해 지식·전문가 중심의 4만2천916명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사할린으로 파견됐다. 소비에트화 과정에 반목이 생겨 선주민들은 이들을 ‘큰땅백이’라 부르며 구분했다.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소련은 북한 노동자를 모집했는데, 1946∼49년에 2만6천65명이 파견됐고 1만4천395명이 돌아갔다. 수산업과 항만노동에 주로 종사하던 이들을 ‘파견노무자’로 불렀다.

 선주민 대부분은 소련 국적 취득이 향후 귀국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삶을 이어왔다.

1956년 학업을 위한 대륙 진출이 허용되자 자녀들이 학업을 위해 국적을 취득할 때 함께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북한의 선동으로 일부는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

 한인들은 무국적자의 신분이었기에 정식 직업을 갖지 못하고 도로 공사나 건축 현장의 막일과 바느질로 삶을 이어왔다.

 

13-2.jpg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한인들.
소련 체제 하에서 무국적자로서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에 한인들의 생애사는 이를 극복하는 삶의 여정으로 점철돼 있다. 점차 안정을 찾은 1세들은 육체노동에서 탈피해 상업 종사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시장경제로의 전이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한인들은 삶의 질을 높이는 기회로 극복했다. 강한 교육열과 근면·성실함을 통해 현재 한인들은 중상층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해외에서 집거지를 형성하면 바로 설립하는 것이 학교다. 모국어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광복과 함께 한인들이 몰려든 코르사코프에 1945년 조선학교(교장 조상천)가 개교되면서 사할린 전역으로 확장했다.

 1950년에는 72개 학교와 5천300여 명의 학생이 있었고, 1963년에는 32개 교에서 7천200여 명의 학생들이 수학했다. 교원 부족, 학생들의 러시아어 수준 저하 등을 이유로 1963년 조선학교는 폐쇄됐다.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학교를 대체한 곳은 언론이었다. 1956년 10월 1일 사할린텔레라디오방송사 산하에 조선어라디오방송국을 개국했다.

 1992년 우리말방송국으로 개칭하고 민족 정체성 회복과 모국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우리말TV방송국을 개국해 민족의 역사, 문화, 전통은 물론 현대 한국인의 생활을 알리고 있다.

 방송에 앞서 1949년 하바롭스크에서 창간된 「조선로동자」 신문이 1950년 사할린으로 이전하면서 민족신문으로 발간됐다. 1961년 「레닌의 길로」, 1990년 「새고려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도 모국어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고, 사할린 최초로 한글학습소를 조직해 한글을 가르쳤으며,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함으로써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한인들 개개인도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음력달력이 없는데도 1세들은 가족의 생일과 조상의 기일은 꼭 음력으로 지냈으며, 상례는 3년상으로 했다. 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설과 추석이다.

 특히 추석은 음력 추석이 너무 추워 야외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양력 8월 15일에 해방절 행사와 함께 지낸다.

아침에 차례를 모시고 성묘를 다녀와서 한인들이 모여 운동회와 전통놀이를 행한다. 사할린 한인 1세들은 친척이 없기 때문에 같은 지역 출신끼리, 동성끼리 계를 조직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계는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로 호칭하며 친척과 같은 확고한 조직이다. 계는 경조사의 부조 등을 비롯해 타향에서의 삶을 위로하는 조직으로 사할린 이주사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것이다.

 # 한국과의 교류

 1883년 10월 3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공항을 경유,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보잉 747기가 사할린 남서해안을 지나다 소련 공군기에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한 이 비극적인 사건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사할린과 사할린 한인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 KAL 007기 피격 피해자 추모제.

 1988년 12년 만에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참여하는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됐다. 올림픽 위성중계를 통해 사할린 한인들과 러시아인들은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었고, 사할린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다. 이후 개혁·개방정책에 의해 소련이 해체되고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하면서 한인들의 조국에 대한 열망이 고조됐다.

 발전된 모국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을 갖게 된 한인들은 가장 먼저 중단됐던 한국어 교육 재생사업을 전개했다. 건물을 마련하고 한국어 교사와 교재를 준비해 1988∼89년 8개 구역 12개 학교에서 교사 15명이 학생 463명에게 한국어 교육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북한으로부터 교과서와 학습장을 지원받아 시작했던 한국어 교육은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교재가 지원되고 교사 연수가 실시돼 정상적인 교육이 진행됐다.

이때 많은 지원을 했던 것은 당시 휘경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임태식 회장이 이끈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다. 현재는 교육부 산하의 사할린한국교육원(1993년 개원)이 중심이 되고 사할린국립종합대학 동양학부,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 제9동양어문학교와 지역별 문화학교에서 한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귀국을 위한 노력

 재외동포 중 모국으로 귀국을 가장 열망하는 지역이 사할린이다. 한인들 중 90% 이상이 원적(아버지의 고향)을 경상도에 두고 있다. 모국으로의 귀국이 삶의 목적이었던 한인들은 끊임없이 소련 당국에 귀국을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소련은 도만상 등 5가구 40명을 북한으로 강제 추방하기도 했다.

13-조선어독본.jpg
▲ 1959년 발행된 김병하의 4학년용 조선어독본
 소련 체제 하에서 귀국을 위해 노력한 곳은 도쿄에 본부를 둔 ‘화태억류귀환 한국인회’였다. 소련과 수교한 일본은 사할린에 남아 있는 일본인들을 1957∼59년까지 모두 귀국시켰는데, 이때 일본인과 혼인한 배우자들도 대상이었다.

일본인 부인과 함께 도쿄에 온 박노학은 동료들과 함께 ‘화태억류귀환 한국인회’를 조직하고 한국과 소련, 일본, 유엔에 탄원서를 보내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호소했다.

 또한 사할린 한인들과 한국의 가족들 간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사할린 한인이 도쿄에 있는 박노학에게 편지를 보내면, 이를 다시 대전에 있는 아들 박경식에게 보내져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서신 교환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안부를 전하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7천 명에 이르는 사할린 억류 한인들의 명부를 작성할 수 있게 했다.

 국내에서도 1947년 ‘사할린 한인 귀환 조기실현협회’가 조직됐고 뒤를 이어 이두훈을 중심으로 ‘중소이산가족회’가 1968년 구성돼 사할린 한인을 돕고 있으며, ‘지구촌동포연대(KIN)’는 사할린 영주 귀국자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지원하고 있다.

 사할린 현지에서도 사회단체를 구성해 사할린 한인의 권익 보호와 영주 귀국, 고국 방문 등을 추진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17개 단체가 난립했으나 현재는 사할린주한인회를 주축으로 이산가족회, 노인회, 여성회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양심세력과 함께 끊임없이 일본 정부에 모국 귀환과 보상을 요구했다. 일본인 변호인 다카키 겐이치를 중심으로 한 소송을 통해 제한적인 보상과 영주 귀국이라는 결실을 얻어냈다.

 # 꿈에 그리던 귀국, 또 다른 이산

 2차 사할린 소송을 통해 일본 정부의 정책이 변화하면서 사할린 한인에 대한 관심과 정책의 전환이 이뤄졌다.

 1988년 사할린 한인들의 모국 방문과 영주 귀국이 허용되면서 춘천시 사랑의 집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 22개 도시에 4천300여 명의 한인 1세들이 모국에 정착했다.

단일 도시로는 5개 시설에 1천268명의 영주 귀국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인천광역시가 가장 많다. 인천에서 가장 많은 영주 귀국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남동구는 국내 최초로 남동사할린센터를 건립해 영주 귀국자들의 국내 거주를 지원하고 있다.

 1945년 8월 31일 이전 출생자와 배우자 또는 장애인 자녀에 국한된 영주 귀국은 사할린 한인사회에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남기고 있다.

▲ 제9동양어문학교 상급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공노원

 1959년까지 진행됐던 사할린 내 일본인 인양 시 일본인만이 아닌 타 민족 가족도 포함해 인양했던 것을 목격했던 한인들은 가해자들도 했던 가족의 귀국을 불허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은 꿈에 그리던 모국에 돌아와 살기 위해 자녀·손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또 다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가족이 그리워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영주 귀국자에게 배정되는 임대아파트는 2인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부부가 아닌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사람과 동거 형태로 생활하면서 사소한 충돌로 시작해 서로 반목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별·시설별로 임대료가 차이가 있어 형평성 문제도 있다. 안산 고향마을은 임대료가 없는 반면 남동구 논현동은 월 20만 원으로 국내에서 가장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거주하고 있다.

 이제 세밑이다. 마지막 남은 달력이 벽에서 떨어지면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원도 중단된다. 12월 초 진행된 사할린에서의 영주 귀국 설명회를 마지막으로 한인들의 영주 귀국과 역방문 등이 종료될 위기에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소련과 러시아에 의해 그들 문화에 습합하면서도 끊임없이 모국어를 지켜내고 민족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우리와 한민족이다. 가장 많은 영주 귀국자를 품에 안은 우리 시민들이 모국에 돌아와 외로이 살아가고 있는 영주 귀국자들을 생각하고 위로를 주는 세밑이 됐으면 한다.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