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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 하라 세츠코의 사망 소식이 세간에 전해졌다. 향년 95세의 나이에 운명을 다한 그녀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한 이래 일본 영화의 1930년부터 1961년까지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여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1962년 은막에서 은퇴한 후 조용히 살아온 하라 세츠코의 타계 소식은 그녀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더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온화한 미소와 겸손한 몸가짐, 따뜻함이 묻어나는 말투와 마음 씀씀이는 하라 세츠코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이다.

 전후 일본 영화는 당시를 이끌었던 일련의 명감독인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하라 세츠코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940∼50년대 영화의 품위와 기품을 책임지던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영화인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1960년작 ‘늦가을’을 통해 추억 여행을 떠나 보자.

 꽃처럼 맑게 빛나는 스물네 살의 아야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뭇 남성들의 가슴을 깨나 설레게 했던 아야의 어머니 아키코는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오히려 세월과 함께 기품이 더해진 현재의 모습은 그녀의 품위를 높여 준다. 남편의 오랜 친구들은 여전히 잊지 않고 아키코 집안의 대소사를 살뜰히 챙겨 준다. 그리고 제법 숙녀가 된 아야를 위해 세 친구들은 발 벗고 중매에 나선다.

 혼기에 들어선 아야는 내심 결혼을 원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 배경에는 홀로 남게 될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속사정을 보다 못한 아버지의 친구들은 아야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아키코의 재혼 작전도 함께 추진한다.

 그러나 친한 친구의 미망인과 그 딸을 돕기 위한 이들의 계획은 오해를 낳고 만다. 자매지간으로 보일 만큼 살갑고 정이 넘쳤던 모녀 사이는 어머니 재혼에 대한 아야의 오해로 커다란 틈이 생기고 만다.

 아야는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걱정하긴 했지만, 막상 재혼 이야기가 오가니 섭섭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됐지만 딸의 속마음을 알게 된 아키고. 남은 숙제를 잔뜩 껴안은 엄마는 딸의 미래와 자신의 처지 사이에서 굳은 결심을 내리게 된다.

 하라 세츠코가 미망인 아키코로 출연한 작품 ‘늦가을’은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오즈 감독의 계절 연작이라 할 수 있는 ‘만춘(1949)’, ‘초여름(1951)’, ‘이른 봄(1956)’으로 이어지는 계절시리즈의 완결작으로 원숙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오즈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결혼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의 단골 소재로 활용했는데, 이는 ‘늦가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매번 비슷한 소재와 구성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은 진부하지 않은 따뜻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그는 결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가족 간의 이별, 변화, 사랑, 외로움, 기쁨, 감사 등의 다양한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즈 감독의 뮤즈인 하라 세츠코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만남이 인간 내면의 한숨과 고민, 사랑과 숭고함을 따뜻한 시선과 함께 녹여 냈기 때문에 이토록 오랫동안 찬사를 받는 것은 아닐까!

 세대와 시공을 초월한 잊지 못할 배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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