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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수 베드로 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성소국장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왠지 모르게 설레는 것처럼 가톨릭 신부(神父)인 저도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은근히 빨간 양말에 담긴 선물이 머리맡에 놓여 있을 것 같은 꿈을 꾸기도 합니다.

 예전에 머물던 성당에서 성탄 밤 미사를 앞두고 무엇인가 신자들에게 깜짝쇼를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필수 요소인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룩한 성탄 밤 미사 때 제의를 입고 한바탕 춤 출 자신도 없고 해서 생각해 낸 것이 제비뽑기였습니다.

 성당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되는 주보라는 간행물이 있습니다. 주보에는 그날의 성경 말씀에 대한 신부님들의 강론과 전례에 대한 해설 그리고 행사에 대한 정보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위해 성당에 들어설 때 주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성탄절 밤 미사 주보에 번호를 매겼습니다.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주보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지 전혀 모른 채 받아갔습니다.

 대개 성당에서는 성탄 밤 미사 때 한 해 동안 열심히 봉사한 분들이나 성탄을 앞두고 특별한 과제를 내 준 것을 성실히 수행한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며 격려하곤 합니다.

이러한 통상적인 순서를 마치고 드디어 주보에 번호를 매긴 비밀을 밝힐 차례가 됐습니다. 저는 마치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타고 내려가기 전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은 설렘을 안고 신자들에게 각자 받은 주보를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보 어딘가에 번호가 매겨져 있을 텐데 그 중에서 열 명만 제비뽑기를 해서 어마어마한 선물을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은 갑자기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나 자기가 뽑히는 행운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더불어 그 어마어마한 선물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인지 성탄 미사 중에는 볼 수 없었던 초롱초롱한 눈빛들로 반짝거렸습니다.

제가 한 명씩 번호를 부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엄숙하고 고요했던 성당은 한바탕 시끌벅적해졌습니다. 당첨된 열 명의 신자에게는 어마어마한 선물이라고 과대 광고한 성탄 케이크 한 상자씩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탄 밤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 중에 가장 어린 아이와 가장 연세가 많은 어르신께 추가로 케이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장 어린 아이는 엄마 품에 안긴 갓 돌을 넘긴 아기였고, 어르신은 여든이 훨씬 넘은 할머니셨습니다.

 제가 감동받은 순간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제비뽑기를 하나씩 할 때마다 신자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번호가 아니라는 사실에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아기와 할머니가 케이크를 받을 때에는 모두가 천사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성당이 떠나갈 정도로 큰 박수를 보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고아와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4복음서에는 고아와 과부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공통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배려심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만 커져 간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기와 할머니가 케이크를 받을 때 신자들의 표정 속에서 우리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의 능력이 내재돼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선물은 받을 때도 좋지만 그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할 때 더욱 큰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 기쁨의 원천은 선물을 받은 이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거나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무상의 증여에서 비롯됩니다.

더불어 나에게 소중한 가족, 친지, 친구, 직장 동료가 아닌 익명의 누군가라면 그 기쁨은 열배, 백배로 커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익명의 누군가가 언젠가는 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줄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성탄절에는 여러분만의 깜짝쇼를 준비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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