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jpg
▲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어김없이 연말이 왔고 곧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이맘때면 성탄절의 훈훈함과 희망을 느끼면서 동시에 지난 한 해를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올 한 해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아들이 유학을 갔고 새해 초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뉴스일 것이다.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는 시가 약속한 재정 지원을 해 주지 않아 과반의 교수들이 서명을 해서 성명서를 붙이고 한 일, 나라 안을 보면 메르스로 난리를 치고 북한은 여전히 지뢰 매설 등으로 도발을 계속한 것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멀리 나라 밖을 보면 파리에서 IS의 테러 그리고 기후협약 체결이 가장 큰 비보이자 낭보가 아니었을까? 매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같은 듯 같지 않은 일, 사건들이 일어나고 이에 슬퍼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인가 보다.

 나이를 점점 더 먹으면서 체력은 떨어지고 몸은 아픈 데가 많아지지만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주위에 친구들은 하나둘 퇴직을 하고 부모님 상 소식 아니면 아이들 시집·장가 보낸다는 연락이 오니 정말 나이 먹는 것이 실감된다.

나이 먹을수록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과 원칙이 있으면 다행인데 그마저도 없으면 무척 불행할 것 같다. 몸이 늙으면 의학적으로 정신도 총기가 떨어지겠지만 인생을 사는 지혜는 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주변에 공직에서 한자리씩 하신 선배들을 많이 보지만 나이 들어서 인생의 지혜보다도 여전한 노욕만 커지는 선배들이 많다.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없다면 인생 사는 것이 너무 슬플 것 같다.

 아이들 가르치고 자기 공부하는 것이 공자님도 이야기한 인생 즐거움 중에 하나지만 지난 학기 유럽과 중국 등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가르친 한국경제론 과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 수업이었다.

 독일과 스페인에서 온 학생들이 수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아주 열심히 강의를 듣더니 기말고사와 기말 레포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 모두 A를 넘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이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우리가 지난 11월 아시아경제공동체포럼에서 같이 찍은 사진으로 만든 카드와 초콜릿 선물을 전해줬다. 우리 학생들한테 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그들의 작지만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과 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한 해 연구자로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면 원래 미국 유학 당시부터의 전공이었던 소련 경제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경제에 대한 미련이랄까 책임 때문에 깊이 있게 도전을 못했던 중국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한 것이다.

그동안 소위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로부터의 신경제사고(new economic thinking from Asia and for Asia)’를 화두로 미국의 신경제사고연구소와 매년 아시아경제공동체포럼과의 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기는 했지만 지난 여름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비교경제학회대회에 참여한 것이 내 중국 연구의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대회 기조강연자로 발표한 에이브너 그라이프 스탠포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논문 주제가 놀랍게도 나의 관심사와 매우 비슷한 유럽과 중국의 경제와 제도, 문화의 비교연구였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법인(corporation)과 종족(clan)이 유럽과 중국의 경제가 다르게 발전하게 된 핵심 협력 단위였다는 것이다.

 그의 발표를 보고 중국 연구, 특히 경제와 문화의 상관관계가 구미 정통 경제학계에서도 주요 주제로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다른 연구자들의 인용과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가 어쩌면 보완할 수 있는 지평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대신 차를 매우 좋아한다. 차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오래되서 좋은 차와 어리고 신선해서 좋은 차이다. 전자의 대표가 보이차이고 후자는 한국의 우전차이다.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에서는 10대나 20대에 커다란 학문적 기여를 하는 천재들이 종종 나온다.

그러나 인간사를 연구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천재보다는 세상에 대한 지혜를 깨달은 현자가 나올 수 있다. 자연과학의 천재가 우전차라면 사회과학에서의 현자가 보이차일 것이다.

이미 천재가 되지 못했으니 새해부터는 좀 더 옛 성현의 지혜를 배워 보이차 같은 현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 볼까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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