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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기 칼럼니스트
김명인 학형, 이승철 시인, 벗 김용락, 크리스마스다. 주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그런데 김하기가 왜 새누리당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했는지 변명의 글을 쓰려니 가슴 아프다. "김하기는 ‘완전한 만남’에서 ‘완전한 변신’으로 갔는가? 누가 나에게 답을 달라"고 했던 김명인 평론가, 속으로는 ‘완전한 변절’로 쓰고 싶었을 텐데 어쨌든 고맙다. 이승철 시인도 「완전한 만남」의 작가 김하기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라고 말했는데 당연한 요구다.

 난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이 죽어 갈 때 광주 사람 죽이지 말라고 부산 남포동에서 유인물을 뿌려 처음 잡혀가 40일 동안 보안대 지하실에서 온몸이 가짓빛이 되도록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다시는 잡히지 않으려고 총을 들고 탈영해 사흘간 산속을 헤매다 총구멍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발가락에 걸고 자살하려고 했다.

이후에도 두만강 삼합에서 300여m의 두만강을 건너다 큰물에 휩쓸려 익사 직전에 북으로 떠내려가 천운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평론가 김명인 교수를 만난 것은 전주교도소다. 나는 부림사건으로 들어갔고 김명인은 무림사건으로 들어왔다. 김명인과는 58개띠 같은 나이지만 사상적으로는 김명인이 형이다.

우리는 전주교도소 비전향장기수를 수용하는 특별사동에서 만났다.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경험은 바보의 스승’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매우 어리석기 때문에 이론보다는 경험을 통해 소설을 썼고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가치를 배워 왔다.

장기수들과의 오랜 옥중 경험에서 「완전한 만남」을 썼다. 김명인도 썼듯이 살인적인 고문과 협박 아래서 견결히 사상을 지켜내는 그들에게 강렬한 숭고함을 느꼈다. 그 소설의 여파로 인해 비전향장기수들이 우리 사회에 알려지고 석방돼 고향으로 북송되는 일도 있었다.

 출소 후 난 분단 이후 최초로 625리 철책선을 따라 걸으며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라는 책을 쓰면서 꼭 북한에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속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1996년 7월 여름소설학교를 중국 옌볜(延邊)에서 열 때였다.

 두만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헤엄을 쳐서 북으로 가서 한 달 만에 돌아와 구속됐다. 나의 변호사는 노무현, 문재인이었다. 난 나를 열정적으로 변호해 준 그들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서 내가 두 눈으로 본 북한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경제도, 인권도, 자유도 없는 오직 일인세습독재공화국, 동토의 나라였다. 김일성·김정일 세습 우상화로 종교화된 사이비집단이었다. 이런 권력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들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 중 교화시키는 데 가장 오랜 기간을 잡는 이들이 소위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작가라는 직업군이다. 근본적으로 작가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하고 그만큼 획일적이고 우상화된 것을 싫어 하기 때문이다.

 두만강 도강 이후 북한에 환멸을 느껴 사상적으로 난 뉴라이트 계열인 김문수 전 지사, 김진홍 목사를 사숙했다. 몇 년 전부터 매주 북한인권법 통과를 위해 여의도에서 집회를 했고, 김문수·하태경·김태훈과 함께 북한의 자유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때 그 사건은 나에게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객관적이고 통합된 시각을 만들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다. 큰 강을 건너 천하를 이롭게 하는 괘다. 난 두만강을 건넌 후 대한민국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이어령 장관 밑에서 전문기획위원도 했고, 김문수 경기지사의 특보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 이전에 난 글을 쓰는 소설가, 작가임을 하루도 포기한 적이 없다. 글은 나의 운명이고 생명이다.

 큰 강을 건넌 뒤 사상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소설을 배반한 적은 없다. 소설은 사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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