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문 변호사.jpg
▲ 이기문 변호사
머릿속이 하얗다. 어지럼증이 극에 달했다. 을미년인 2015년의 국민들이 느낀 한국사회 모습이다. 국민들은 혼돈의 회오리 상태에 빠져 있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시인 최동은의 ‘술래’라는 시는 오늘의 우리 심정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내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지럼을 느끼고 있다. "나는 죽었는데 뻐꾸기가 우네/ 나는 죽었는데 비행기가 날아가네// 흰나비를 따라가며 개가 짖네/ 개를 따라가며 사람이 짖네/ 자두꽃이 떨어지네// 나는 죽었는데 시외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가네/ 나는 죽었는데 옥수수들 하늘을 이고 서 있네//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술래/ 느티나무 길을 다시 걸어와/ 오래 밥을 먹고 있네."

 내가 죽어 있어도 뻐꾸기는 울고 비행기는 다닌다. 내가 죽어서 흰나비가 됐는데도 개는 죽은 나를 쫓아와서 짖어대고, 짖어대는 개를 나는 다시 쫓아가서 짖고 있다. 그러니 세상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죽어 있어도 시외버스는 여전히 먼지를 날리며 다니고, 옥수수라는 생명체는 여전히 자란다. 나는 결국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고 말았다. 술래인 나는 다시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길을 다시 걸어야 하고, 밥을 먹고 있어야 한다.

시인의 노래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멋있는 삶을 그리워해도 결국은 회오리바람 속으로 들어오는 우리들의 가련한 모습을 말이다. 술래인 우리들이 되고 싶은 멋진 흰나비는 오늘 우리에게 없을까? 우리가 죽어서 흰나비가 됐어도 역시 그 흰나비를 쫓아와 짖는 개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현실이다.

 성탄절이 지났다. 예수님이 잠시 우리 곁에 다가와 "회개하라"고 외치는 현실을 이제 우리는 까맣게 잊었다.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만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나라의 지도자들, 여당이든 야당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의 미래이고, 너는 나의 과거이다.

하지만 또한 나는 너의 과거이고, 나는 너의 미래이다.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라고 우기는 세상을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다. 이것이 2015년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넋을 빠뜨리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분명히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서로가 거울이 돼서 서로의 잘못을 스스로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잘못은 보지 않고 남의 잘못만 보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나의 영혼은 깨끗하고 너의 영혼은 더럽기 때문일까? 너 안에 감춰진 권력의 더러움을 너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감춰진 더러운 권력 의지를 탓하는 추악한 모습만이 난무하는 2015년의 모습.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회개하라"라는 가르침의 주체는 바로 "너가"가 아니라 "내가"라고 바꿔야 할 것이 아닐까? 그래야 이 땅이, 대한민국이 천국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처럼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삶의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마리아 지역은 더럽혀진 지역이어서 유태인들은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의 고통을 들어줬다. 그리고 그의 친구가 돼 줬다.

 그런데 여당이나 야당이나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며 친구가 돼 주는 지도자가 2015년도에 있었을까? 2015년의 화두였던 세월호 희생자들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성추행을 당한 사람이나 성추행의 모함을 받은 이들의 친구가 돼 준 정치지도자가 있었을까? 고통을 당한 이들이, 폭정의 희생자들이, 수사권력의 희생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들어준 술래들의 희망이 과연 2015년에 있었는가말이다.

여전히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의 압박을 가하고, 헌법재판소는 한일협정 청구권의 재판을 외면하고 말았다. 대법원은 더욱 보수화돼 가고 있고, 자연적 정의를 외면하고 있다. 채찍을 든 경찰들은 노총위원장을 소요죄로 다스리려고 한다.

청와대의 한마디에 여당의 지도자는 당정일치를 주장하고, 야당은 사분오열되면서 추악한 모습의 정치를 반복하고 있다. 여전히 그들은 세상의 지배자로 남아 있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술래인 나는 죽었는데 말이다.

 죽어서 흰나비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흰나비가 된 나를 쫓아오면서 짖는 개들이 도처에 있고 비행기는 여전히 날고 있다. 시외버스는 먼지를 휘날리며 술래인 나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숨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숨이 막힌다. 어지럽다. 술래인 국민에게 희망이 돼 줄 그 누구도 없다. 3김 시대가 저문 후에 보이고 있는 골목대장들의 대장놀이에 이제 우리 술래들은 지쳤다. 대통령도 스스로 골목대장 대열에 합류했다. 교수들은 이를 혼용무도라고 일갈했다.

게다가 김무성도, 원유철도, 문재인도, 안철수도 모두 골목대장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문제는 술래인 우리 국민들의 삶의 고통이다. 이제는 술래인 국민들이 우리들의 삶의 희망을 찾아내야 한다. 안거낙업(安居樂業)을 가져오게 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2015년의 과제이고, 2016년의 명제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