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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내리자마자 녹으니 올 겨울에 눈 밟을 기회가 없었는데, 지리산 북서사면에서 오랜만에 긴 시간 눈길을 걸었다. 여기저기 선명한 동물 발자국이 새벽 눈발로 희미해질 즈음 하늘이 파랗게 열리더니 먼 산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가 귀를 청아하게 했는데, 지난해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 사이로 겨울잠 없는 동물들이 분주해 보였다. 등산 인파가 드문 산록. 사람의 방해 없이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숲과 생태계가 안정될 듯싶다.

 지리산의 외딴 동네는 전혀 춥지 않았다. 한 시간 이상 얼었던 뺨은 현관문을 열자 다가온 훈풍으로 금세 따뜻해졌다. 지리산의 겨울을 무색하게 하는 산골집의 화목보일러가 효율이 높다지만 적지 않은 장작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해가 일찍 지는 산골에서 훈훈하게 지내려면 적지 않은 장작을 준비해야 할 텐데, 어디에서 구해야 하나? 제재소의 자투리 목재를 주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산길 가장자리 배수로에 가지런한 나뭇가지들은 주민이 가져가려고 모은 불쏘시개라는데, 장작은 어디에서 구할까?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의 일부만 잘라 가도 충분하다고 장담한다.

물론 산림청이나 국립공원의 재산이지만 주민들이 난방을 위해 가져가는 것까지 문제삼지 않는다고 한다. 어차피 쓰러진 나무는 정리해야 하므로.

쓸 만한 목재로 관리하기 위해 조림수종을 때때로 간벌해야 하는데 그때 발생하는 나뭇가지도 주민의 난방용으로 넉넉하단다.

 산록에 쓰러진 나무들은 그 생태계에 어우러진 생물이 볼 때 쓸모없는 쓰레기가 아니다. 쓰러지기 전 나무에 둥지를 치던 동물에게 터전이고, 나무줄기에서 먹이를 찾는 딱따구리에게 생존의 중요한 수단이다.

쓰러져 방치된 나무는 너구리와 족제비의 집이 되고 남은 뿌리는 살모사와 능구렁이의 동면 장소가 된다. 시간이 지나 온갖 버섯이 자리잡으면 생태계는 풍요로워지고, 머지않아 푸석푸석해지는 등걸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건강한 숲을 보장해 준다.

 울창했던 숲이 일제가 베어 간 뒤에도 가난한 백성이 난방을 위해 잘라 가면서 헐벗었던 적이 있었다. 연탄과 석유를 널리 보급하며 나무 심기에 나서자 산림은 겉보기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조림지를 빼놓으면 축적된 수목은 아직 충분하지 않고 예전처럼 다채롭지 않다. 키 큰 나무 사이에 어린 나무가 충분치 않아 지속적인 보호가 필요한 상태다.

식물상이 충분해야 동물의 안정된 서식이 가능하고, 서식하는 동물이 다채로울 때 숲이 건강할 수 있으니 우리 숲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산길 가장자리에서 나뭇가지를 챙기고 넘어진 나무를 자르는 산골 주민들 때문에 숲이 헐벗을 정도는 아니다. 부자 나라들의 불황이 수그러들지 않고 이란에서 수출을 재개하면서 석유가격이 일시 떨어졌지만, 다시 오른다면 화목보일러 수요가 산골에서 소도시로 확장될 수 있는데 그 이후가 걱정이다.

조상처럼 춥게 살지 않을 사람들의 수요를 우리 숲이 감당할 수 있을까? 국제 석유는 이미 정점을 지났다. 퍼올리는 양보다 소비량이 많다. 석유가격은 머지않아 오를 텐데 숲은 내내 보존될 수 있을까? 숲 속 동식물은 온전할 수 있을까?

 부뚜막의 가마솥으로 밥을 지으며 난방을 해결하던 시절, 겨우내 두툼한 옷을 벗지 않던 조상은 군불로 겨울 긴긴밤을 서늘하게 보냈지만 겨울이 여름처럼 더운 요즘은 어림도 없다.

 단칸방 초가삼간에서 한 가족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는 건 상상조차 불가능하더라도 후손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화석연료가 바닥을 드러내고 석유가격이 치솟아도 산록의 생태계가 보전돼 풍성한 이야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늦기 전에 실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겨울철 집 안에서 외투를 벗지 않는 독일인은 우리의 에너지 낭비 풍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전기 과소비를 부추기는 산업구조를 바꾸지 않는 정책에 고개를 갸웃한다.

 단열이 철저한 주택과 건물의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전기 소비효율을 높이는 독일은 재생가능한 자원으로 전기를 자급하려 노력한다. 독일보다 태양빛이 풍부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조상은 알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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