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제 불은초등학교장
최근 잇단 아동학대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홍역을 앓고 있다. 부모의 감금과 학대에서 겨우 탈출한 11살 소녀 사건을 시작으로, 7살 아들을 폭행으로 숨지게 한 뒤 시신마저 훼손한 부모와 중학생 딸을 폭행 살해하고 11개월이나 시신을 방치한 목사 부부 사건은 충격을 넘어 경악 그 자체였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아동학대 사건은 최근 10년 동안 7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15건 이상의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 아동학대 발견율이 0.1%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통계조차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낮은 신고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기소유예나 혐의 없음으로 처리돼 면죄부를 받았고, 기소돼 정식 재판에 넘겨진 아동학대 사건은 32%에 불과하다.

 엄연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방임과 솜방망이 처벌이 아동학대 증가에 일조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2014년 한 해 동안 학대로 숨진 어린이가 17명에 달했는데 장소 대부분이 가정이었고, 가해자의 82%가 아동의 부모였다.

 우리 선조들이 자식들을 엄한 질책과 매질로 가르쳤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교육 또는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 부모의 아동학대는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식 그릇된 교육 방법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나쁜 일이 발생하면 책임질 위치에 있는 어른이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주는 자책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예컨대 조상매라는 것이 그것이다. 조상매는 아들이나 손자가 인륜에 어긋나거나 못된 짓을 하면 밤에 조상의 무덤을 찾아간다.

무덤 앞에 엎드려 ‘자식을 못 가르치고 못 보살펴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조상님 앞에서 매를 맞겠습니다’하고는 종아리를 걷고 상돌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아들이나 손자에게 힘껏 치도록 시킨다. 자식 교육을 잘못한 책임을 피가 나도록 채찍질하게 해 자책하고, 그 자책으로 자식의 개심을 유발하는 교육 방법이 조상매인 것이다.

 이런 자책은 부모만이 아니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도 관할 지역에 인륜을 해치는 사태가 일어나거나 극심한 가뭄 등이 발생하면 자신의 교화 소홀과 실정 탓으로 돌리고 자책의식을 갖는 관례가 있었다.

하늘기둥이라 해 천심이 오르내리는 매체로 신성시하던 동헌의 복판 기둥 앞에 무릎 꿇고 피가 흥건히 옷을 적시도록 머리를 찧어댐으로써 자책했다. 또는 동헌 뜰 앞에 책단(責檀)을 쌓아 놓고 웃옷을 벗고 올라앉아 가죽 끈으로 핏발이 서도록 자신의 등을 때려 자책했던 것이다.

 논어 안연편은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 不可則止(불가즉지) 無自辱焉(무자욕언)’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충고를 해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되 말을 듣지 않거든 그만둬라. 지나친 충고로 도리어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충고나 가르침은 상대방에게 진심과 정성으로 일러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기본위이고 주관적이다. 때문에 남들이 아무리 그 결점을 진정으로 말해도 쉽사리 충고를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결점을 시정하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충고를 하거나 남을 선도하는 데 있어서 과격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내심으로부터 변화돼 각성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며 훈도의 길인 것이다.

 굶주림과 매질, 강압과 질책으로 자녀를 바로잡거나 훈도하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개심은커녕 자녀의 가슴에 배신감과 원한을 심어 줄 뿐이다. 교육이란 강요나 주입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학습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과 행복이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욕구나 대리만족에 집착하면서 정작 당사자의 꿈과 행복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부덕과 가르침 부족 때문이기에 피가 나도록 매질해 자책하던 우리 선조들의 교육 방법을 재삼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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