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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역과 송도역 간 표준궤간을 가진 최신식 복선전철이 개통된다. 이로써 지난 2012년 6월 개통된 송도~오이도역 구간과 연결돼 인천에서의 노선은 일단락된 셈이다.

그러나 옛 수인선의 부활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왜 ‘수인선’이라고만 해야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오랜 관행으로 통칭돼 온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는 안타까움은 남았다.

 일제강점기 수인선은 1935년 9월 착공해서 1937년 8월 6일부터 운행하기 시작했는데, 인천의 인천항역(남인천역, 수인역)과 경기도 수원 사이에 국유가 아닌 사설(私設)로 부설됐던 ‘협궤’철도였다.

 철도의 표준궤간은 로마시대 마차(兵車) 수레바퀴의 너비로, 수레바퀴가 오랜 세월 길을 달리다 보면 바퀴 자국이 자연스럽게 홈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통일돼 1천435㎜의 국제표준 철도궤간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광궤와 협궤로 분류됐던 것이다.

 그러나 철도의 궤간은 특별한 원칙이 필요치 않았다. 일본 군부는 경인철도와 추후 점령할 만주지방 철도와 연결을 위해서 표준궤간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지형과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궤간의 넓이를 달리할 수도 있었다.

수인선은 ‘사설철도’였기 때문에 건설비나 운영비가 상대적으로 절감되는 협궤철도를 선택했던 것이며, 따라서 표준규격에 반도 못 미치는 762㎜로 결정됐고, 기관차 역시 소형의 ‘꼬마열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인선은 경기도 내륙의 미곡을 인천으로 수송하고, 인천으로부터는 생활물자를 보낼 생각으로 부설했는데 결국 인천항에 결집한 쌀은 일본 수출에 용이하다는 계산이 짙게 깔려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남동염전의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에 철교를 놓음으로써 처음부터 남동·소래·군자염전의 소금을 수송할 목적으로 개통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기존에 있던 월미도유원지를 국방상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그 대체 수단으로 옥련동 해변에 송도유원지를 조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3.3㎡에 5전 하던 이 일대의 땅이 하루아침에 5∼10원까지 오르는 등 투기가 판을 치기도 했다.

 수인선 개통에 앞서 1936년 10월 일제는 인천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면서 부천군 문학면의 일부였던 옥련리를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이름까지 송도정(松島町)이라는 왜식(倭式)으로 바꿨다.

이 시기는 만주사변과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던 때로, 인천 곳곳에 새롭게 생겨나는 지명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듯 일제 군함의 이름이 명명되고 있었다. ‘송도’ 역시 당시 군함이었던 ‘송도함’이 있었기에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역명에 옛 수인선의 역명이었던 ‘송도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송도 지명의 개명이라는 논란을 뒤로하더라도 ‘지리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송도로 가실 분은 송도역에서 내리지 말고 ‘원인재역에서 환승’해야 송도(신도시)로 갈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필요한 실정이다.

 수인선은 비록 일제의 수탈을 목적으로 개설됐다고는 하나,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근대문화유산인 것은 틀림없다.

이렇다 할 대중교통시설이 없던 시절 서민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고, 일반 열차보다 폭이 훨씬 적은 ‘협궤’라는 점 때문에 꼬마열차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았었다.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를 찾았던 것도 시대의 한 풍속이었다.

 1990년대 중반 수인선의 기능과 경제성이 떨어짐에 따라 전체 협궤열차 노선을 폐지하고 새롭게 전철 광궤화 노선을 부설하기로 결정했다.

이제야 개통되는 인천의 새 철도는 원도심 활성화를 기대하는 시민들의 염원과 함께 수도권 인적 교류의 증대를 통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것으로 본다. 교통편의시설의 증대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고 추억을 남기는 명소로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지혜가 모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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