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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83세에 생을 마감한 노인이 있다. 성인이 된 이후 60여 년이 넘는 그녀의 인생에 동반자라고는 없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친·인척과 연락도 끊고 살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려 했기에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뉴욕 태생으로 미국인이었지만 묘한 프랑스 억양으로 인해 늘 이민자로 오인됐던 그녀. 고독하고 쓸쓸했던 기나긴 삶 뒤에 그녀가 남긴 것은 15만 장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현상되지 않은 필름들뿐이었다.

단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던 그 사진 속에는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진 그녀와 그 사진들은 순식간에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오늘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통해 생전에 전하지 못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역사책에 쓰일 시카고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수집하던 존 말루프는 집 근처 벼룩시장에서 필름이 가득 담긴 상자 하나를 구입한다. 사진을 살펴본 말루프는 작품들에 매료돼 영수증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비비안 마이어’를 추적해 나간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엔진 어디에서도 그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존 말루프는 역사서 집필을 잠시 접어 두고 꼭꼭 숨어 있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낸다.

사진 작가나 저널리스트로 추정되던 기대와는 달리 비비안의 직업은 보모였다. 타인의 가정에 거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그녀는 무슨 까닭에서 그토록 많은 양의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수소문 끝에 비비안을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은 사람마다 그 평가가 천차만별이었다.

 따뜻한 사람, 어두운 사람, 즐거운 사람, 염세적인 사람 등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토록 어긋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녀는 수집광이었고 무척 비밀스러운 사람이었죠. 언제나 사진 찍을 준비가 돼 있었어요."

생의 찬란하고 밝은 순간보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더욱 관심을 보였던 그녀. 그래서 그녀가 남긴 사진 속에는 고단하고 힘든 숱한 삶의 기록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초라한 일상 속에서도 찰나의 희망과 즐거움도 놓치지 않고 포착해 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채 비극 속에 살다 가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비안 마이어라는 여류 사진작가와 그녀의 작품들이 발굴돼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포착한 그때 그 시절의 사진 속에는 비평가 엘런 세쿨라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온기 그리고 유머와 비극’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살아생전 비비안은 결벽적일 만큼 자기 자신과 그 소유물들을 깊숙이 숨겨 둔 채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던 그녀의 사진 속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온기뿐 아니라 외롭고 쓸쓸했던 그녀 자신도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 고독감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와 그녀의 사진에 열광하게 만드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홀로 간직하고자 했던 연약한 영혼의 외로움을 허락 없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편한 마음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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