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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성 변호사
1987년 5월께다. 영천의 어느 군부대 연병장에 121명의 부대원들이 군장을 메고 줄 지어 서 있다.

 "차렷! 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귀관들은 금일 저녁부터 5박 6일, 야영지 훈련과 더불어 150㎞ 야간 행군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수험과 경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번 훈련을 통해 정화하길 바란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길 바란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든 부대원들이 하나가 돼 무사히 원대 복귀하길 바란다. 이상!"

 군악대의 힘찬 환송 음악을 뒤로하고 121명의 부대원들은 어둠 속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산속의 깊은 도로에는 별과 달 이외에는 거의 불빛이 없고 가로등도 없다. 하늘에 놓여 있는 북두칠성과 주위 별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앞서 걸어가는 전우의 발을 보면서 묵묵히 걸어야 한다. 저 멀리 가끔 산속에 보일 듯 말 듯하는 민가의 불빛이 이 깊은 산골에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밤새 뜬눈으로 걸어야 하는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고 고통이 심하다.

 야영과 행군을 시작한 4일째, 나는 무릎관절의 고통으로 철모와 군장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맨 앞에서 기수를 들고 걸어가던 친구가 내 철모와 군장을 들어준다. ‘아! 자신도 엄청 힘이 들 텐데. 2년 동안 동기이면서 철저한 경쟁 상대였던 친구였는데, 내가 힘이 들 때 자진해 무거운 내 짐을 스스로 챙겨 행군하다니….’

 그 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끔 사법연수원 동기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 깊은 곳에 저장돼 있던 법무관 훈련 때의 장면 하나. 지친 내 군장과 철모를 대신 들어준 동기생의 이름과 얼굴.

 드디어 이달, 연수원 동기 골프 모임에서 30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됐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하얀 머리카락이 보이고 볼록하게 배도 나왔지만 대구 팔공산 주변을 돌던 야영지 행군 때의 그 단정한 모습과 얼굴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 친구는 건강한 마음의 소유자답게 현재 훌륭하게 지내고 있다.

 지금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모든 나라에서 한국의 특전사 유시진 대위로 상사병 수준의 사랑앓이를 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경찰은 관영 웨이보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너무 몰입해 보면 건강에 해롭고 남녀 관계에도 해로울 수 있다고 게시, 주의를 당부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을 좋아하는 현상은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지극히 당연스러운데, 공안까지 나서 주위를 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만큼 드라마의 사회적 영향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30년 전 같은 부대원으로서 야영지 행군 훈련을 하던 전우들이 이제는 법원장, 검사장, 변호사, 경찰청장, 기업인,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법무관 군사 훈련시절에 유시진 대위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동기생의 어려움을 도와준 많은 전우들은 영원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 저장돼 남을 것이다.

 한편으로 유시진 대위와 같이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순수한 젊은이들이 그대로 성장하고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성숙됐으면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금도 수많은 유시진 대위들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유시진 대위와 같은 젊은이들이 더 많아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가 태양의 후예의 결론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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