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jpg
▲ 김윤식 시인
엊그제 휴일 북성동 청관(淸館)을 지나치다가 많은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인파는 청요리와 짜장면을 맛보기 위해 온 나들이객들이었다. 인천시민들도 상당수였지만 서울을 비롯한 인근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더 북적였다. 상호 덕분에 유명해진 어느 요리점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청관이라는 것은 과거 우리식으로 이르던 차이나타운의 이름이요, 청요리는 그들이 내는 음식을 칭하던 말이다.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차이나타운보다는 여전히 청관을 더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다. 어쨌거나 그 많은 반점 중에 호떡집은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시내 몇 군데 이름난 청요릿집 외에는 거개가 호떡과 만두를 파는 가게였다. 내동·경동·금곡동·화평동·만석동 일대에 여러 호떡집·만둣집들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문을 닫은 곳도 있겠지만, 기억으로는 이 호떡집들이 1970년대 이후 대부분 짜장면과 탕수육, 군만두, 유산슬, 라조기 등속을 파는 요리점으로 전향한 것 같다.

 호떡이나 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대신에 이문이 박하기 때문이라고 어느 화교가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맞는지 이제 중국 호떡가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청관 일대에 넘쳐나는 중국요릿집 중에 한두 군데라도 호떡집이 들어섰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것이 참 아쉽다.

그 맛이 영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일(高逸)선생이 인천 호떡에 관해 쓴 구절을 읽으면 짐작이 갈 것이다. "인천에서 명물로 치는 것은 호떡과 냉면이었다.

 큼직하게 부풀어 오른 뜨끈뜨끈한 호떡을 입에 넣으면 사탕 꿀이 질질 흐른다. 한 개에 1전을 했었는데, 그것이 2전에서 5전까지 올라가는 동안 인천 호떡은 명물이 되었다." 호떡에 대해서는 1932년 잡지 「동광」에 실린 이무영(李無影)의 소설 「두 훈시(訓示)」에도 "쟁반만한 누러케 구인 호떡! 칠칠 흐르는 싷검언 꿀!"이라고 군침이 돌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사실 청국인의 호떡집은 그 꿀맛과 싼값을 무기로 인천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 웬만한 도시에서도 크게 번창했었다.

실제 당시 호떡이 얼마나 전국적으로 조선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었는지, 1922년 11월호 「개벽」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국민 계도성 글이 다 실려 있을 정도다. "형제여 조선인 유일의 생도(生道)는 외화(外貨) 거부(拒否)에 전재(專在)하얏나니 토산(土産)에 순(殉)하는 토민(土民)이 되기를 간곡히 원한다. 시장하야 점심을 하겟거든 우동집이나 호떡집에 가지 말고 설렁탕이나 장국밥집에를 가라. 손을 대접하겟거든 하필 청요리 일요리(日料理)가 나을 것 무엇이랴. 구수하고 푹운한 조선요리가 조치 안흐랴."

 1927년 2월 「별건곤」 잡지에는 차라리 한탄과 경계조의 글이 실려 있다. "오전짜리 호떡집이라고 깔보지를 마라. 물론 하류계급 사람들이 만치마는 학생도 드러오고 신사도 드러온다. 이 좁고 더러운 집이언만 한 오 분 동안에 나까지 합하야 다섯 사람이 드러오고 안젓던 사람이 둘이 나간다.

 한 사람이 한 개씩만 먹어도 삼십오 전이요 두 개씩 먹는다면 칠십 전, 한 시간이면 사 원 이십 전 내지 팔 원 사십 전의 돈이 가난한 우리 조선사람 호주머니로부터 얼골 식껌어코 의복 불결한 지나인(支那人)의 호주머니로 옴겨간다. <중략> 작년의 호떡장사가 금년의 요리옥 영업자 되는 것도 또한 무리가 아니요 그네들의 돈 버는 수단이 얼마나 영악한지도 여긔와서 알 수가 잇다."

 하기야 육당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도 술을 못했던 까닭이라고는 하지만, 항시 군것질감으로 주머니에 호떡 따위를 넣어 가지고 다녔다고 하니….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할 때 ‘인천 호떡은 명물이 됐다’는 고일 선생의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에 호떡집이 번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31년 만보산사건 여파로 당시 피해를 본 인천시내 중심가 호떡집만 해도 그때 기록으로 11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 전체 조선인 인구는 5만여 명이었다.

 끝으로 강화에 있었던 호떡 관련 실화 하나를 소개한다. 1940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사다. ‘강화읍 관청리에 사는 스물여섯 살 엄순근(嚴順根)이라는 대식가 청년이 한 개에 2전짜리 조선 떡 200개와 호떡 40개를 먹었다’는 내용이다. 그러고도 ‘양이 차지 않아 즉석에서 냉면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것이다.

 키는 ‘5척(尺) 내외의 건강한 사람으로 별명이 하마(河馬)라는데 그의 선대도 밥 한 그릇과 서 되치 시루떡을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력까지 재미있게 전한다.

 아무튼 이 대식(大食)은 고사하고라도 그 옛날처럼 ‘칠칠 흐르는 싷검언 꿀!’을 한번 다시 맛보고 싶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청관 인파를 상대로 호떡집을 차리면 손은 많이 가도 틀림없이 ‘대박’을 칠 텐데, 장사의 귀재라는 중국인들이 그 생각은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운영되는 지역민참여보도사업의 일환입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