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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용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정도 강했으며 국가관과 애국관 또한 투철했고,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 시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조명하려는 시도는 1948년 정지용의 서문으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이후 1970년대에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한국 영화가 우리 근현대 시인 가운데 최초로 그를 스크린에서 살려내 관객들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주선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했던 그의 조부는 그곳 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교육사업과 개척사업에 매진했었고, 부친 또한 장로이면서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윤동주는 이러한 지사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시대에 대한 인식과 양심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성장배경에 기인한 측면이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작품활동을 했던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 직전까지는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격랑의 시기였다.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부끄러움과 소외의식에 의한 절망감뿐만 아니라 자책적이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엄격한 자기 고백적인 면모는 이러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육사와 달리 윤동주는 저항시인이기보다는 결벽적인 순수한 휴머니스트에 가까웠다. 그는 따뜻한 가슴과 여유 있는 너그러움으로 인간을 응시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따가운 혐오와 불편한 회의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나 자괴감과 충돌하면서 겪는 내적 갈등은 ‘간(肝)’, ‘쉽게 씌어진 시’, ‘참회록’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혹독할 만큼 정직하고 솔직한 시인이었다. 영화 ‘동주’에서 다가오는 감동도 자신에 대한 그의 엄격한 태도에 기인한다. 이해는 사실을 대상으로 하지만 감동은 진실을 상대로 한다.

 총은 고종사촌인 송몽규에게 불의의 시대와 맞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고, 시는 윤동주에게 절망적인 시대와 겨룰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비겁과 무기력을 고백한 그대로의 인생을 꾸밈없이 살다 28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를 쓰던 시기의 윤동주가 바라보는 세상은 전쟁의 잿빛으로 만연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세태를 송몽규는 무력으로 대응했고, 윤동주는 시로 수용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일자리 문제, 경제 문제, 북핵 문제와 각종 엽기적인 살인사건 등으로 우리 주변은 여전히 뒤숭숭하다. 미국의 대선 과정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우리에게는 불길하기 짝이 없다. 전혀 새로운 국제 질서가 대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면한 사태에 대한 인식이 냉철하고 정확해야 원인과 이유에 대한 규명도 빠르고 확실해진다. 그런데 냉철함과 정확성은 경우에 따라서 이성과 논리와 계산보다 감성과 본능과 양심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양심은 사태 파악의 가장 엄격한 기제로 작용한다. 몽규와 동주도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저항의 물리적인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양심에 근거한 태도는 동일했다.

 이익과 명예와 권력에 의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양심에 맡겨진 국가의 미래는 위험하다.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높은 법적·도의적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자’의 말대로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난세이듯이 윤동주의 양심에 동감하는 현재는 창피함을 외면하고 억지와 반칙이 판치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학연과 혈연으로 개인의 노력이 판단되고 지연과 기득권으로 개인의 능력이 결정되는 사회에 정의와 희망이 있을 리 없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 ‘동주’에 공감하는 데에는 영화적인 재미 이외에 이 시대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부끄러움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격을 확인하는 불편하지만 가장 인격적인 감정이다. 양심을 가리는 위선에는 악한 본심을 선행으로 숨기는 악질적인 위선과 다수를 위해 선으로 위장하는 공익적 위선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후자의 위선은 불가피한 위선이었다. 어떤 시대 양심이 그나마 우리에게 필요한지 동주의 양심에 비춰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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