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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근대 개항 후 인천은 항구의 특성상 무역과 산업의 공간으로 줄곧 인식돼 왔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지난 130년 근현대사의 중심지로만 인천을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인천 가치 재창조’의 기치(旗幟)는 비류의 미추홀 정착으로부터 2천30여 년 유구한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인천의 이야기를 보다 확장시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례를 두 편의 어제시(御製詩)를 통해 생각해 본다.

 어제시는 왕이 손수 지은 시로, 대부분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에 그 의미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창작한 것들이다.

 왕·왕비·대비 등의 장수 또는 쾌차를 기원하는 행사, 탄신·가례·환도(還都) 등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롯해 사직·종묘 등에서의 제향이나 능원으로의 행행(行幸), 궤장의 진상, 문무과·기로과 등의 시행, 서적의 편찬과 간행, 활쏘기 및 내원(內苑)의 꽃구경, 기로연·양로연 등의 설행, 세자의 상견례 등의 행사에서 왕이 시를 짓는 것은 상례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어제집(御製集)을 지속적으로 편찬했다. 세조 9년(1427)에는 형조참판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해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 시문(詩文)을 거둬 모으게 했다.

세조 이후의 왕들도 전대 왕의 어제집을 꾸준히 편찬했고, 합부(合附)해 「열성어제(列聖御製)」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 정조의 경우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799년 규장각에서 편찬했는데, 정조의 사상과 당시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총 500여 건의 ‘어제시’가 나타나는데 왕에 따라 창작 횟수에 차이가 있어 정종·문종 등과 같이 한 편도 남기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세조·연산군·숙종·영조·정조 등은 비교적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이는 왕의 문예적 성향을 보여 주는 것이면서 군신 간의 결속을 다지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의미로도 분석된다.

 어제시와 관련해 인천에도 정조의 시 2편이 전해진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한 군주답게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차운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정조 21년(1797) 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원 현륭원으로 행차하는 도중 김포 장릉에 들렀다가 부평과 인천을 거쳐 수원 화산에 이르는 행행(行幸) 과정에 시를 남기고 있다.

 먼저 부평에서는 "계양산색의 그 모습은 그지없이 곱고(桂陽山色極嬋姸), 백리 들판엔 풍년이 들었구나(百里秋登上上田)/ 백성들이 넉넉하고 정사가 공평하니(民富政平斯可矣), 누가 능히 무성의 현가를 다시 이을고(誰能更續武城絃)"라고 해 부평(富平)이라는 고을 이름에 계양산과 풍성한 들녘과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그의 정치적 업적(民富政平)을 빗대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어가가 인천(仁川) 경내를 지나갈 때 또 1편의 시를 지어 당시 명필로 알려졌던 인천부사 황운조로 하여금 쓰게 하고, 인천 관아에 걸도록 명했다. 이어 소래산 아래 자리한 하연(河演)의 묘와 조동면에 있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유(致侑)케 하고 있다.

어제시는 그해 8월 동헌에 걸렸는데, 시에는 "바람 깃발 휘날리며 해문을 돌아오니(風旅擸擸海門廻), 소래산 좋은 경치에 눈이 번쩍 뜨이네(秀色蘇來眼忽開)/ 높다란 군자봉을 서로 가리켜 보이어라(君子峯高入指點), 혹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지 않을는지(儻非中有隱淪才)"라 해 당시 바다를 끼고 학산서원과 소래산으로 상징되던 인천에서의 인재 양성과 그 갈망을 군자봉에 빗대어 전하고 있다.

 오늘 200여 년 전의 어제시 2편을 음미하면서, 이 시를 동헌(東軒)에 걸어 두고 인재를 기다리던 정조의 마음을 인천 교육 속에 녹여 볼 수 있다면, 또 시민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는 인천을 투사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역사에서 발견하는 이 시대 인천 가치 구현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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