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무 아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끌어안은 거적(巨跡)이다. 인천시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에 우뚝 서 있는 양버즘나무다. 나이(132살)만큼이나 크기 또한 웅장하다. 높이 30.5m에 둘레만도 4.7m에 이른다. 급기야 이 큰 나무는 2015년 6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이 양버즘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은 응봉산(鷹峰山) 구릉인 자유공원이다. 그 이름도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

인천 개항 5년 뒤인 1888년 11월 9일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서울의 탑골공원(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당시의 이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다. 파라다이스 인천 인군이 열리면서 들어온 중국과 일본·미국·러시아·영국·독일 등 외국인거류민단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외국인들로 각국 거류지가 미어터지자 1914년 거류지가 철폐됐다. 일본인들은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그 세력을 넓혔다. 그때 자유공원은 ‘서공원(西公園)’으로 불렸다. ‘동공원(東公園)’은 신사가 있던 답동사거리 공원이었다.

그러던 자유공원은 해방 후 다시 ‘만국공원’의 이름을 되찾았다. 1957년 10월 3일 개천절, 그 공원은 지금의 이름으로 또다시 바뀐다. ‘만국공원’은 과거 치욕의 산물이니 이 이름만이라도 ‘자유공원’으로 갈아치우자는 여론에서였다.


지금 자유공원은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보다는 보수와 진보의 대척지대로 더 알려졌다. 맥아더 동상이 자유공원 한가운데 서 있어서다. 동상은 김경승 홍익대 교수가 제작해 1957년 7월 15일 세워졌다. 아픈 역사의 상징물은 또 있다. 1982년 건립된 한미수교(韓美修交) 100주년 기념탑이다. 응봉상 정상에는 1905년 1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을 관측한 기상대가 있다.

개항 당시 외국인들이 들여와 심어 우리나라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양버즘나무가 서 있는 자유공원 주변은 온통 인천의 역사다. 내항을 둔 북성동이 그렇고, 차이나타운과 신포동이 또 그렇다.

북성동은 원래 지금처럼 남루한 동네가 아니었다. 1974년 인천항에 동양 최대의 도크가 건설되기 전만 해도 그곳은 인천 어느 곳에서도 꿀리지 않는 동네였다.

개항 이후 증기선이 등장한 1930년대 이전까지 만해도 북성동 앞은 ‘칠통(七通) 마당’으로 불렸다. 지금 인천중부경찰서에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에 이르는 선착장이다.

칠통마당은 황해도 해주·연백, 강화, 충남 서산·당진 등지의 곡창지대에서 벼를 실어 나르는 풍선(風船)의 전용부두였다.

뱃사람과 선창의 일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볏섬과 쌀가마니를 싣고 내렸다. 물산객주와 권번업소의 거간들이 사고팔기에 열을 올렸다. 떡장수와 엿장수가 한데 어우러져 칠통마당은 언제나 북새통이었다. ‘칠통마당의 쌀장수들이 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연안 해운에 밀린 칠통마당은 그 운이 사그라들었지만 북성동만은 여전했다. 연안 객선과 어선들이 몰렸던 것이었다.

북성동1가 3통의 ‘새우젓골’과 ‘뱀골’은 그때 이름을 얻었다. 전국의 어선들이 북성동에 몰리면서 북성동 새우젓골 안쪽에는 커다란 소금창고가 생겼다. 소금창고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우잡이 배들이 꼬였고, 북성3통은 드럼통에 새우젓을 담는 골목이 됐다. 1960년대만 해도 북성동은 ‘인천 돈의 절반이 모이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북성동1가 2통의 ‘뱀골’도 이때 생겼다. 그 시절 그곳에는 ‘색싯집’이 즐비했다. 선주와 선원들이 뒤섞여 북성동 술집에서 며칠 낮밤을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술값으로 돈이 떨어진 선원들에게 막걸리 한 잔에 공짜 안주로 나오던 것이 지금의 물텀벙이었다.

색싯집에 푹 빠져 여인숙에 장박(長泊)을 하던 뱀 장사꾼이 잡은 뱀을 미처 관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뱀이 밖으로 빠져나가 동네 전체가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다. 뱀골의 연유다.

1974년 도크 건설로 연안여객선과 어선들이 지금의 연안부두로 빠져나가면서 북성동은 불 꺼진 원도심으로 몰락했다

선린동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개항(1883년 1월) 이듬해인 1884년부터 시작됐다. 수출업을 하던 중국인 5명이 처음 지금의 중구 항동 6가 인천중동우체국 맞은편 옛 세관 근처에서 자리잡은 것이다.

청국의 조계지는 선린동 언덕 1만6천500㎡였다. 일본인 거류지보다 서쪽에 있던 중국인 거류지는 습기가 없어 명당으로 꼽혔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법률적 근거도 없이 좋은 땅을 중국인에게 내줬다"며 비아냥거렸다.

당시 중국인들은 본국에서 식료품과 잡화류를 수입하고, 국내의 해산물류를 수출하는 상인들이었다. 지금의 보따리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산둥성 상인들은 화상(華商) 특유의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인천상권의 주류를 이뤘다.

중국인의 유입은 계속됐다. 1883년 45명에 불과하던 중국인은 1897년 1천331명으로 불어났다. 그 증가세는 꺾이지 않았다. 1900년 2천274명이었던 중국인 거주자는 1910년 2천886명으로 늘었다. 1930년대 들어선 중국인 3천265명이 인천에 터를 잡고 살았다. 선린동·항동1가 일대 차이나타운(2만5천725㎡)에 100여 가구 500여 명이 살고 있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당시 중국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입국한 중국인들은 이전의 산둥성 화상(華商)들과 달리 대부분 막노동을 하는 ‘쿨리(苦力)’들이었다. 혼란한 중국 내부 정세를 피해 일자리를 찾아 빠져나온 이들이었다.

1920년대 삼베와 비단, 광목, 소금, 고추 등 생필품을 다루던 인천 화교들은 음식점과 요리를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했다. 화교촌인 청관거리에는 공화춘과 중화루·동흥루 등 청요릿집이 들어섰다.

신포동의 만두와 쫄면의 명성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전국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이 파생상품의 배경에는 125년의 명맥을 지켜온 신포상권이 있다.

1883년 9월 일본인들을 위한 조계가 그려졌다. 해변을 마주한 자유공원 남쪽인 인천시 중구 관동 1·2가와 중앙동 1·2가 2만3천100㎡를 포함해 약 3만㎡였다. 일본영사관터 6천600㎡를 빼면 실제 일본인들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땅은 2만6천400㎡에 불과했다.

조계는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반드시 벽돌이나 돌, 철근으로 벽을 쌓아야만 했다. 지붕은 철판이나 벽돌 기와를 얹어야 했다. 목조건물이나 초가 등은 들어설 수 없었다. 도박장과 매춘장, 아편흡입장 등은 입점할 수 없었다.

일본은 조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1899년 5월 조계 앞 해변을 너비 50m, 길이 258m로 메웠다. 면적은 1만3천200㎡였다. 이 역시 도로와 다리를 빼면 실제 면적은 8천250㎡를 넘지 못했다.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을 거치면서 2천500명에서 4천 명으로 불어난 일본인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주변의 조선인 거주지로 파고들었다. 지금의 신포동·선화동·답동·용동·화수동·만석동 등지였다. 신포동~신생동~중앙동에 이르는 일본인의 메인 스트리트 ‘본정통(本町通)’의 태동이었다. 양복점과 수제화 등 양품점이 즐비했던 본정통의 상권은 이후 신포동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일본 어선과 어민들이 1888년 4월부터 인천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따냈다. 그 구실은 신선한 어물의 제공이었다. 척당 10원씩 하는 입어료만 내면 다른 세금 없이 자유롭게 조업하고 어획물을 인천항에 팔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포동 문화의거리에 생선 깡시장이 생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인들의 돈이 넘쳐나자 일본 본국은 인천에 은행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중앙동에 일본 도쿄의 제일은행 인천지점(1888년 9월 개설)과 일본 18은행의 인천지점(1890년 10월 개설)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 까닭이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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