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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혜영 국회의원
박근혜정부 집권 3년은 역사의 퇴행 그 자체였다. 경제정책 실패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국정화,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에 이어 반인권적인 테러방지법을 강행 처리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고 삼권분립의 헌법정신을 유린한 독재적 국정 운영의 결정판이었다.

 지난 2월 23일, 더불어민주당은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에 돌입했고 38명의 야당 의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 192시간 25분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국민들은 처음 접하는 고품격의 정치행위에 매료됐고, 아낌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 주셨다. 비록 테러방지법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우리 당은 기적과도 같이 20대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됐다.

 필리버스터로 대표되는 국회선진화법은 ‘몸싸움 국회’의 오명을 벗고 대화와 타협을 근간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의 본령에 다가서기 위해 도입된 제도적 장치다. 하지만 정작 국회선진화법이 왜 시작됐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됐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명박정권 출범 100일여 만에 시작된 18대 국회는 172:82라는 의석 수가 말해 주듯 참담함 그 자체였다. 2008년 말,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은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고, 한미 FTA 비준안을 날치기 상정한 데 이어 휴대전화도청법 등 MB악법으로 명명된 85개의 법안 처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민주당의 초대 원내대표였던 나는 12일간의 본회의장 농성투쟁을 이끌며 MB악법을 저지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우리 국회에 법치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겠는지 본질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성찰 끝에 본회의장 농성을 마감하는 성명을 통해 다수당의 일방적인 국회 운영을 견제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 도입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정당한 절차에 의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통로가 보장된다면 다수당의 횡포도, 소수당에 의한 극한적인 저지 투쟁도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리버스터 도입과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 강화를 골자로 한 ‘국회법개정안’을 당론으로 추진해 채택했고, 2년에 걸쳐 끈질긴 협상을 이어간 끝에 2012년 5월 2일,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상당수의 여당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19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뒤늦게 태도를 바꾼 대통령과 여당에 의해 줄기찬 마녀사냥을 당하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 청구까지 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지난 26일 헌재는 당연하게 ‘각하’ 결정을 내렸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몸싸움 국회는 사라졌고, 대화와 타협의 민주적 방식은 거부할 수 없는 국회 운영의 원칙이 됐다. 20대 총선의 결과로 그 정당성을 둘러싼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해졌다.

 이제 대화와 타협의 민주적 원칙 위에 생산성까지 인정받는 ‘일하는 국회’의 위상을 정립해 갈 때이다. 일각에서 제기해 온 ‘발목잡기’, ‘식물국회 원인 제공’ 등의 비판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회선진화법의 올바른 취지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되 미비하거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진즉에 필리버스터가 가능했더라면 폭력의원이라는 낙인도 없었을 것"이라던 강기정 의원의 눈물을 아프게 기억한다. 만시지탄이지만 비로소 우리 정치가 시대의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국회선진화법은 단순히 국회 운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정당 내부의 체질과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결국 우리 정치문화를 새롭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돼 줄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의 취지를 더욱 발전시켜 국회의 위상과 권능을 강화하고 보다 품격 있고, 보다 민주적이며, 보다 생산적인 국회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정치적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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