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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강원도 산골 사람도, 또 북쪽에 가계(家系)를 둔 월남(越南) 자손도 아닌데 유난히 냉면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물론이거니와 한겨울에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덜덜 떨며 냉면을 즐긴다. 이러저러 심정이 답답했다가도 이 음식을 한 그릇 하고 나면 씻은 듯이 말끔해진다.

그런데 정통 명물 냉면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가 인천 냉면의 명줄이 아주 끊어지는 것이나 아닌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냉면은 평양이 원조라고 하지만 ‘인천 것’을 못 따랐다. <중략> 내동 내리예배당 층층대 아래와 그 맞은쪽 평양관 언덕 쪽은 인력거꾼도 가기가 힘이 들어 타던 사람이 미안해서 내려 걷던 길이었다. 이곳에 인천 냉면의 원조가 여러 집 있었다.

지금도 간혹 보이지만, 색종이로 등 같은 것을 매달았었다. 국수틀이 나무통이고, 긴 방아 자루 같은데 사람이 드러누워 층층대를 거꾸로 내려가듯 발로 틀을 내리눌러 국수를 짜냈다. 갖은 고기 양념을 넣어서 한 그릇에 5전을 받았다. 10전, 15전, 20전 이렇게 올라갔으나 인천 냉면을 서울 사람들이 더 많이 사 먹었다.

 답동에 사정옥(寺町屋)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많이 먹으러 왔다. 표관(瓢館)에서 활동사진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이 집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고, 주식시장에서도 장거리 전화를 걸어 일부러 인천 냉면을 주문했다.

전화를 받으면 곧 주문한 수량대로 스무 그릇 이상이나 되는 것을 긴 목판에 싣고 자전거로 서울까지 배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서로 경쟁을 해서 경인 냉면 배달 자전거 경주대회 같은 느낌을 준 일도 있었다. 그 후 기차 편을 이용하여 대량 주문에 응하던 것은 자전거 배달로는 위험성과 신속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석금」에 보이는 고일(高逸)선생의 기록이다.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나 선생이 언론인이었으니 대체로 사실일 것이다.

 이 비슷한 이야기는 신태범(愼兌範)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도 나온다. "미두장을 중심으로 점심을 사 먹는 인구가 부쩍 늘면서 냉면, 비빔밥, 장국밥 같은 비교적 고급인 식사를 제공하는 업소가 탄생했다. 평양관(용동), 경인관(용동), 신경관(경동), 사정옥(답동), 복영루(금곡동) 등이 번창했다. 주문받은 점심을 직접 현장에 배달도 했는데 값은 업소 내와 같은 20전이었다. 냉면대접을 빽빽이 여러 그릇 겹쳐 놓은 긴 목판을 어깨에 메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달리는 배달꾼의 멋있는 모습은 한 폭의 거리 풍물화이기도 했다."

 인천의 옛 본바닥 내동에서 태어난 까닭에 1950년대 집 근처에 있었던 냉면집들 풍경이 기억에 있다. 냉면집 입구에는 예외 없이 긴 장대 끝에 종이 술이 많이 달린 둥근 등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고일 선생의 기록 그대로였다.

또 신 박사께서 묘사한 대로 냉면그릇이 잔뜩 담긴 긴 목판을 한 손으로 잡아 어깨에 얹은 채 자전거를 비스듬히 뉘이고 곡예하듯 다른 한 손으로 타던 배달꾼도 봤다.

 아무튼 인천 냉면이 경인 간에 유명했던 것은 그 맛에 있었을 것이다. 맛이라면 면도 면이지만 먼저 육수 맛을 봐야 한다. 인천 냉면의 육수는 동치미 국물이 아닌 쇠뼈와 양지머리 등을 밤새 고아낸 ‘육수(肉水)’였다. 이것이 바로 ‘평양냉면이 인천 것을 못 따른’ 차별점이었던 것이다.

인천은 개항 이후 이른 시기에 소 도축장이 생긴다. 주로 외항선과 일본인 소비를 위한 것으로 스테이크용 살코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산물은 조선사람 몫이었다. 이렇게 인천에는 육수를 만들 재료가 풍부했다. 그러니 냉면에 얹는 쇠고기 편육도 다른 곳보다 흔했고 보편적이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어업용 제빙공장이 여러 곳 생기면서 얼음이 흔한 이곳에서 겨울밤 밤참용 메뉴였던 서도지방의 ‘메밀국수’를 손쉽게 여름음식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특히 당시로서는 귀물(貴物)이었던 얼음덩어리가 들어있는 것이 신기했고, 사철음식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신 박사의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태어난 정통 인천 냉면이 아쉽게도 이제는 시내 경인식당과 평양옥에서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근래에 흔한 백령냉면이나 옹진냉면, 사리원냉면은 ‘원 인천 것’과 면도 편육도 다르다.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은 더더욱 아니다. 입맛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이제 정통 인천 냉면의 흥왕은 다시없을 것 같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운영되는 지역민참여보도사업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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