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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휘 정치학박사/청운대 교수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 50분, 국방장관실에 모인 자들은 당시 절대적인 실력을 행사하던 신군부 장군들(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김준봉 2군사 작전처장, 류병현 합참의장, 전두환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방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이다.

 당시 전두환 장군은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고 국정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위상이었고, 정호용과 노태우는 전두환과 육사11기 동기생으로 하나회를 주도하는 자들이었다. 류병현이나 차규헌은 비록 선배급 장군이었지만 소장파 신군부장군의 위세에 동조해 자리에 연연하는 상황이었기에 중요한 의사결정에 특별한 역할은 없다고 할 것이다.

 군의 의사결정 특성상에 하급제대의 건의(자위권 발동)가 있어야 상급부대가 검토를 한다. 그렇다면 공식적으로는 계엄사령부의 광주상황대책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자위권 발동을 절차적으로 내정한 것으로 정리하고, 최종 결정은 비공식적인 신군부에서 임의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으로 사료되는 바, 훗날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혼선(混線)을 조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강변했지만 「제5공화국 전사」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발언기록상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군인복무규율(제34조 무기사용 제1항에 ‘신체·생명 또는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에 의한 초병의 정당방위 차원에서 ‘자위권 행사’에 대해 특별히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에서 이미 광주발포가 검토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두환 장군은 광주발포를 막을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 동의를 통해 방조했거나, 이희성 장군의 건의를 사전에 5공 실세들의 각본대로 건의토록 계략을 꾸몄거나, 아니면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과도한 충성심에서 저지른 만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국민에게 총질을 했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처벌받은 군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결과는 ‘광주사태’라는 민란(民亂)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분들에게 국가적·역사적·시대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진실이 당대에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가려진 일은 없지 않은가?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제 노후에 접어들어 언제 어느 날 역사 속에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4년 9월 15일 대국민담화에서 "우연의 산물인 듯싶은 역사적 사건들도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필연적 인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역사의 물줄기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인 것입니다"라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을 호소하며 자신의 옳은 행위를 정의라고 강변했었다.

1995년 12월 2일 대국민담화에서도 "끝으로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제5공화국을 책임졌던 저에게 모두 물어주시고"라는 선언을 했었다. 그렇다면 그는 국민 앞에 책임지는 자세로 진실을 말해야 하며, 광주발포에 대한 책임을 지는 대인(大人)의 모습을 줘야 한다. 5월의 국민적 고통을 치유해 줘야 한다.

 육사는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이했다. 육군사관생도는 정예장교의 명예덕목으로 그 근본을 정직(正直)에 두고 훈육된다. 거짓말은 곧 퇴교(退校)다.

이제 역사 앞에 우선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는 것이 육사 출신 장군으로서 모교의 명예를 지키고, 후배들에게 영원히 존경받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군에서 장교들은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단지 상급자라는 책임으로 인생이 좌절되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그런 차원에서 ‘광주발포의 책임은 적어도 자신에게 있다’는 용기 있는 발언을 통해 생사를 같이 하며 따랐던 수많은 부하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희생자들과 그 유족을 위로하고, 역사 속에 자신의 명예도 지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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