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연기념물 제315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애처롭다. 전봇대 위 변압기와 전깃줄에 얹힌 이파리가 안쓰럽다. 군데군데 속 빈 가지들의 땜질도 서글프다. 빌라 촌 틈바구니에서 햇볕 대신 이끼가 자리잡은 줄기 또한 애석하다. ‘학자(學者)나무’로서 묻어나야 하는 선비의 향기는 옅다 못해 사그라들었다.

천연기념물 제315호(1982년 11월 4일 지정)로 500년 삶의 노거수(老巨樹)의 기품은 문드러졌다. 인천시 서구 신현동 131-7번지 제 땅(656㎡)도 아닌 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회화나무(높이 22m·둘레 5.3m)다. 그 가여운 몰골은 주인을 잃은 텅 빈 빌라와 그 형세를 잃어 가는 주위의 모습을 빼닮았다.

 ‘새고개’ 신현동(新峴洞)은 지금처럼 남루한 동네가 아니었다. 반경 2~3㎞ 안에 강남시장과 중앙시장, 거북시장, 가좌시장 등 작지 않은 크기의 전통시장이 4개나 있다. 과거 신현동의 부(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남시장은 1980년대 중반 가정동과 석남동·가좌동 일대에서 최대 상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고개 주변에는 SK인천석유화학(옛 경인에너지)과 목재단지 안 영창악기, 한국전력 등 굵직한 회사들이 즐비했다. 덩달아 석남주공2단지(지금의 월드메르디앙 자리) 등 주거단지가 들어서면서 장사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는 요지였다.

강남시장 위쪽에 자리잡은 SK인천석유화학은 그야말로 ‘신(神)의 직장’이었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꿈의 직장이었다.

 경인에너지는 한국화약과 미국 유니온오일(Union Oil)이 공동 출자해 1969년 세워졌다. 높은 보수와 수준 높은 복지 혜택을 보장하는 외국인 투자회사인 셈이었다.

그만큼 경인에너지에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정도로 비유되곤 했다. ‘자동차 1급 정비사가 국내에 10명도 안 됐던 시절, 정비기사 1명을 뽑는데 100여 명이 경인에너지에 입사원서를 냈다’는 실화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미군 부대에서 자동차 정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관문이었다.

▲ 나무 앞에 놓인 기념비
경인에너지에는 외국인 엔지니어들을 위한 사택까지 있었다. 잔디가 깔린 집 앞마당에서 월풀 욕조를 즐기는 외국인들은 내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곳에는 외국인들과 직원들을 위한 전용 매점과 포켓 당구장 등이 있었고, 차를 타고 가야만 했지만 전용 풀장도 있었다.

 한국화약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화가 경인에너지를 인수해 운영할 때 인천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온 그룹회장이 경인에너지 사택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경인에너지에 다니면 자식들까지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 학교 친구들을 불러서 차를 타고 가는 풀장에 데려가면 다음 날부터는 교실에서 인기 짱이었다. 이렇듯 경인에너지를 빼놓고서는 인근 강남시장이나 거북시장 등의 활성화를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 1980년대 초까지 ‘개 건너’ 목재단지를 두고 인천시내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인천항 덕에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합판과 제재 등 인천의 목재산업과 1969년 8월 세워진 목재단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얘기다.

 1970년을 앞뒤로 정부는 수출주도형 성장 추진 시책과 국내 건축경기 부흥책을 내놓았다. 그런 경기부양책으로 인천의 합판공업은 급상승 기류를 탔다.

 1970년대의 이런 흐름은 얕봄의 대상이었던 ‘개 건너’, 석남·가좌동을 ‘노다지’를 캐는 동네로 돌려놓았다. 이곳 목재업체 사장들은 죄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위세를 과시했다. 나무산업이 부른 풍요였다.

 1964년 제재업체인 동화개발㈜은 가좌동 산 216 일대 갯벌 66만㎡를 메웠다. 수입한 원목을 쌓아 놓고 나무를 켜는 목재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동화개발과 같은 계열사 동화기업㈜은 1970년과 1971년 세 차례에 걸쳐 무려 267만㎡에 달하는 가좌동 갯벌을 매립해 나갔다. 동화기업은 오늘날 국내 제일의 마루목재 생산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터를 이곳에서 닦은 것이었다.

▲ 경인에너지의 전신인 SK인천석유화학.
동화기업이 서구 가좌동 일대를 매립할 수 있었던 뒷심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군사정권과 무관하지 않다. 세간에서는 동화기업을 일컬어 ‘별들의 기업’이라고 불렀다. 퇴역 장성들을 간부로 스카우트했던 것이다. 동화기업이 한창 잘나갈 때 동화기업에 입사한 장군 출신 간부들의 퇴역 당시 계급을 모두 합치면 별이 15개나 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한진그룹 계열사인 대한준설공사도 원목적치장으로 조성하기 위해 가좌동과 석남동 일대를 대상으로 대규모 매립에 들어갔다. 1977년 가좌동 갯벌 2만5천여㎡를 메운 뒤 1979년에는 또다시 석남동 해안 583만㎡를 매립했다. 지금 이 자리는 한진중공업이 조선소 공장 터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석남동과 가좌동에 터를 잡은 목재산업은 1980대 초반까지 승승장구했다. 동화기업과 한양목재, 삼익가구 등 굵직한 제재·목재·합판업체가 서구에 몰려 있었다. 1981년 인천의 나무·가구업계는 181개 업체에 종업원 2만1천198명에 이르렀다. 영창(당시 종업원 2천350명)과 삼익(3천 명) 등 악기 제조업체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당시 인천제조업 산업별 생산액 중 목재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6.3%로 1천441억9천880만 원이었다. 1차 금속(30%·2천646억2천623만 원)과 금속기계(17.5%·1천546억623만 원)에 이어 셋째 가는 산업이었다. 이 무렵 서구의 전통시장들도 덩달아 생기고, 꺾일지 모르는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걷던 인천의 목재산업, 특히 제재업은 그 뒤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대기업들이 값싼 인건비를 노리고 원목 보유국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1차 가공한 합판을 들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 서구의 한 목재단지.
여기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필리핀 등이 자국의 산림자원 보호와 목재가구공업 육성을 위해 원목 수출 자체를 막아 버렸다.

 더욱 결정적인 타격은 나무를 대신할 수 있는 섀시가 등장하고부터였다. 가볍고 값싼 섀시가 목재의 자리를 파고들면서 석남동·가좌동의 목재단지는 침체기를 맞았다.

 신현동은 일찌감치 수도권 전력의 공급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김포갯벌이 매립되기 훨씬 전인 1970년 율도에 발전소가 세워졌다. 1972년에는 국내 최초의 민간발전시설인 경인화력발전소(현재 포스코에너지)도 들어섰다. 경인화력발전소 역시 한국화약과 미국의 유니온오일(Union Oil)이 공동 출자해 건설했다.

 율도를 축으로 원창동과 경서동은 인천의 한국수출산업 5·6공단 등 산업단지는 물론 서울과 경기도 등지까지 수도권 전력 공급의 전초기지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인천의 굵직한 발전시설 중 서구 경서·원창동에만 5곳이 몰려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천지역 발전시설은 전국 발전용량 15%와 수도권 발전용량의 62%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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