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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사전에서 관행이란 ‘그 전부터 관례가 돼 행함’, ‘한 가지 일을 자주 행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관행이란 결국 법적·도덕적 테두리를 위험하게 넘나들며 사회적 합의를 빌미로 동일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일삼는 행태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관행은 이미 정치, 경제, 사회, 예술, 교육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형국이다. 일례로 국민의당은 당규를 어기고 30세의 무명 인사를 뜬금없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무심사 공천한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정치적 관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수 임용에서 특정 국립대학 출신의 학위 논문에 아주 높은 가산점을 주는 것도 공공연한 관행이며, 제약회사 직원이 자사의 약품을 팔기 위해 해당 의사의 허드렛일을 감수하는 것도 관행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여기에 최근에 가수 조영남 씨가 회화에 보조 작가가 참여해서 대부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계 관행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하지만 미술계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관행에 대한 이 언급은 다른 분야의 관행과 달리 실제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이렇게 저렇게 그리라고 시켜서 90% 이상을 그리게 하고 자신이 나머지 10% 덧칠을 해서 완성한 그림을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으므로 자신의 그림이라고 하는 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을 미술계의 관행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이번 조 씨의 대작(代作) 사건에서 불거진 미술계의 관행 시비에는 또 다른 관행의 면모가 숨어 있다. 한국사회는 가짜가 이름으로 진짜처럼 분장되고, 거짓이 포장으로 진실처럼 꾸밀 수 있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관행적이다. 조영남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은 화가 조영남의 그림이 아니라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구입한 것이다.

즉, 조영남의 그림을 예술품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그림으로 산 것이다. 이 대작 시비는 무명 화가 조영남이 아닌 유명 가수 조영남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노래에서 그림으로 전이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유명세와 인지도가 내용의 가치를 결정하는 우리 사회의 어둡고 깊은 관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사기에 속고 가짜에 농락당하는 사태는 유명세를 내용보다 더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허세와 허명(虛名)의식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강하다.

 유명 배우와 관객 수에 따라 관람의 선택 여부가 결정되면서 작품성이 뛰어난 수준 높은 무명의 독립영화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1천만 관객을 훌쩍 넘긴 명작 ‘명량’과 동시에 개봉됐던 ‘약장수’는 관객 수와 관계없이 재미와 감동을 주는 데 손색이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4만여 관객의 영화가 영화계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과 공쿠르문학상에 이어 3대 문학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이후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상이지만 맨부커상이 세계 3대 문학상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와 무관하게 이 좋은 소설이 비로소 문학상 수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관행적으로 인지도가 작품성을 결정하는 현상을 반영한다.

 외국의 중저가 브랜드가 국내에 들어오면 고가 브랜드로 변신하고 한국 소비자들이 이른바 호갱으로 전락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름에 집착하는 한국사회의 관행의 분위기에 기인한다. 배출가스를 조작해서 전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폭스바겐이 유독 한국에서는 보상은커녕 한마디의 사과도 내놓지 않고 있음에도 이 독일차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은 폭스바겐의 배짱은 이 브랜드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과신과 과시욕이 자초한 결과다.

 조 씨의 그림을 유명 가수의 이름에 현혹돼 산 사람들은 대부분 진실의 실체를 알고도 이름에 기대어 샀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이름이 실력을 앞선다. 따라서 구매자들이 진실을 알았다면 조 씨의 그림값은 실력값이 아니라 이름값이다. 색에 물이 들면 공(空)의 세계를 못 보듯이 이름에 물이 들면 그 너머에 있는 순수에 눈이 먼다. 유명(有名)이라는 색에 심각하게 감염된 일그러진 사회에는 위선과 허영이 판을 친다. 내용과 본질을 위한 형식과 이름이 거품으로 전락하지 않아야 진짜가 살고 진실이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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