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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홍 시인
삶의 이런저런 역정에서 힘들고 고단한 시기에는 문득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는 시 한 구절이 있다. 바로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의 장시 ‘해변(바다)의 묘지’에 나오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란 시구다. 얼마나 강렬한 삶에의 지향 의식이 넘치는 시어인가!

 ‘해변의 묘지:내 혼아, 영생을 바라지 말고 가능의 세계를 파 없애라 중에서.’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 덮으며/ 물결은 가루로 흩어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눈부신 페이지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어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그러나 이 시의 전반에 걸쳐 흐르는 상징과 함의(含意)는 결코 유쾌하거나 생동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한 행의 시어를 좌절치 않고 일어나는 불굴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로 삼아 용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요즘의 사회현상을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경기 침체 속에서 저출산·고령화 문제와 취업률 하락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젊은이들은 자조적(自嘲的)으로 오늘의 현실을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이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풍자하는 말)’이라며 냉소 짓고 있고, 노장년층은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노후의 보장이 너무 암담하고 초라해서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자! 이렇게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묘책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모두가 무릎을 탁 치며 파안대소할 방안은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게 또한 냉혹한 오늘의 모습이다.

 그러나 필자는 진부한 권유일지는 몰라도 힘차게 외쳐 본다. "바람이 불고 있으니, 떨쳐 일어나 봅시다!"라고.

 인간의 역사는 항상 현실이 암담하고 절망적일 때 새로운 기풍을 창출해 내어 한 단계 더 발전해 왔다. 굳이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정반합(正反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치열한 고뇌와 갈등의 시기를 거치면 새로운 기풍과 희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즉 개개인의 현실이 아무리 고단하고 먹먹해도 어느 순간 찾아오는 강렬한 삶에의 ‘전력투구’ 욕구를 느낄 때, 이 순간이 바로 ‘바람이 불었다, 떨쳐 일어나자’는 결기(決氣) 응집의 순간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필자와 같은 문인은 그동안 쉬고 있던 펜을 들어 갈망어린 원고를 써 넣어가고,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맥없이 주저앉은 이들은 이력서를 다시 꺼내들며, 인건비도 안 나오는 가게의 주인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경영전략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이 상황을 요즘 잘 쓰이는 언어로 치환한다면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를 만하다.

 회복 탄력성은 크고 작은 역경과 시련, 실패를 오히려 반전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튀어오르는 마음의 힘을 의미한다. 이렇게 다시 튀어오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원래 있었던 위치보다 더 높은 경지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 방식으로 수용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회복 탄력성은 놀랍게 향상된다. 그래서 인생의 나락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굳센 의지,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강인하게 다시 튀어오르는 마음의 힘을 갖게 되면 산들바람이 불어와도 삶의 꼭지를 힘차게 움켜쥐며 일어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바로 내 안에 있는 심미주의 심안에 설치돼 있다. 그러나 관념에 머물지 않고, 강한 의지력을 내포한 실천주의 형상으로 각인돼 있다.

 이 상징주의 명시 속에 투영된 한 행의 시구에서 오늘의 세태를 가르는 청량한 질타와 깊은 페이소스(Pathos)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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