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무가 아니다. 영물이다. 수백 년 초월적인 세월이 흘렀어도 그 영검한 기운이 사방을 덮는다.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98-1번지, 빼곡히 들어선 빌라들 틈에 떡 하니 자리잡은 향(香)나무 이야기다.

 이곳에서 500년을 넘게 산 세월만큼이나 두터운 향나무의 껍질이 철갑처럼 단단하다. 숱한 풍파에 한 번쯤 굽을 만도 한데 곧게 뻗은 줄기는 범상치 않다. 키 17.5m, 너비 13m, 가슴높이둘레 3.5m의 수려한 외관은 장수의 모습을 닮았다.

 특히 붉은 색을 띤 속껍질은 유난히 향이 좋아 깎아 만든 향을 피우면 그 향내가 닷새는 지속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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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초제 함부로 뿌리지 말라

 초여름 태양 볕이 강렬히 내리쬐던 지난 27일. 향나무 주변 그늘에 동네 어른 몇몇이 모여 장기를 두고 있다. 여느 시골 정자나무 아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이미 막걸리 몇 잔에 취기가 오른 어르신은 나무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김 씨, 장기 한 판 더 둬야지. 이번엔 막걸리 말고 소주 됫병이다."

 이 마을 장기 고수로 통하는 김 씨에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김 씨 아저씨가 호기 있게 내기를 건다.

 이들에게 이곳 향나무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는지 물으니 곧바로 경계부터 한다. "나무가 뭘 어쨌는데?" 하는 식이다.

 이들은 기자를 구청에서 보호수 관리 점검이라도 나온 공무원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자신들의 이름도 성도 알려 줄 수 없다며 그냥 다 ‘김 씨’라고 부르란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들어 안 사실이지만 이곳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이들 때문에 관할 동 주민센터에 수차례 민원이 접수됐었다.

 19살에 이곳에 시집 와 살고 있다는 김길동(78)할머니는 "예전에 사람들 민심이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는 게 강퍅하니까 저러지"하며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늘 술에 취해 향나무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젊은 사람들 눈에는 싫겠지만 그래도 저들 아니면 누가 나무에게 벗이 돼 주겠느냐며 그는 이들을 두둔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김 할머니는 자신이 마을 부녀회장으로 있을 때 간혹 이들에게 막걸리 몇 병을 사 들고 가 쓰레기봉투를 나눠 주며 향나무 주변 청소를 부탁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보호수인 향나무를 지키겠다며 2011년 구청에서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쳤지만 실제 나무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저들뿐이란다.

 "지난 여름에는 누가 향나무 주변에 풀이 많이 자랐다며 제초제를 뿌리려는 것을 저들이 막았지. 조상의 묘 주변에 풀이 자란다고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잖아. 향나무는 저들에게도 조상이자 수호신인 게지."

 김 할머니는 "나무도 사람이 곁에 있어야 향을 내고 그늘도 만드는 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조선 왕조의 나무

 ‘신라의 위대한 학자 최치원의 17세 손인 립(砬)이 그의 사랑방 뜰에 손수 심은 것으로 이곳 옛 동리의 이름인 석촌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곳 보호수 안내판에 적힌 향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이와 함께 ‘이 향나무는 약 500년 전 모장수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 우물에서 물을 떠먹고 꽂아 놓았던 말채찍이 소생한 것으로 매년 음력 1월 1일과 8월 15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함’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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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 토박이 이차영(80)옹의 말은 이와 다르다. 오랜 세월 구전돼 온 이야기를 뭐가 ‘맞다’, ‘틀리다’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일인 듯했다. 자신의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옹에 따르면 이곳 향나무는 원래 이 씨 왕조였던 효령대군의 직계 손인 이언섭이 심은 것이다. 실제 조선 영조 때 경기수사를 지낸 무신 이언섭의 묘가 석촌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대한 자료는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이경성 선생이 쓴 「인천고적조사보고서(1949)」에도 나온다. 당시 보고서에는 이언섭의 묘가 경인도로를 따라 원통이 고개를 넘어 주안산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가 왕족임을 알 수 있는 묘지석이 있었다. 높이 2.7m 크기의 묘비에는 ‘삼도통어사 이공 언섭 용호대장겸부총관묘’라고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이 이언섭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따져 이 옹의 본은 ‘전주’가 아닌 ‘경주’여서 이언섭이 실제 조상은 아니다. 하지만 ‘명’자 ‘우’자 함자를 쓰는 자신의 외조부가 제를 올렸던 분이 바로 이언섭이란 것이다.

 또 그의 외조부가 말씀하시길 지금의 이곳 향나무는 이언섭 장군이 자신의 백마를 메어두던 말목이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4살 때까지 외조부 그늘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전주이씨 문중이 이곳 향나무 아래에서 시제를 드리는 것을 여러 번 봐 왔다.

 시제를 지낼 때면 소머리를 우려낸 국물에 흰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나눠 줬다고 했다. 당시 고깃국을 먹기 위해 10리(3.92㎞) 떨어진 원통이 고개까지 긴 줄이 이어질 정도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선농단에 관한 사료에도 나타나 있다. 성종 7년(1476년)에 축조된 선농단은 조선왕조가 조상께 제를 올리던 곳으로 이곳에도 큰 향나무가 있었다. 기록에 보면 제수로 사용한 막걸리는 향나무에 뿌려 주고,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국을 끓여 백성들에게 나눠 주던 것이 왕가의 풍속이었다. 지금의 ‘설렁탕’도 이 같은 풍속에서 유래됐다.

포탄도 막아준 신목(神木)

 한국전쟁 때 어린 동생과 쇠약한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이 옹은 향나무가 자신은 물론 마을을 지켜줬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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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팔미도에서 쏜 함포가 이곳 마을 너머 주안산(지금의 만월산)까지 소낙비처럼 쏟아졌지만 마을에는 단 한 발의 포탄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향나무 주변 석촌에는 초가집 30여 채가 있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흘 밤낮 포탄이 쏟아졌지만 어디 숨을 곳이 있어야지. 집에 있는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동생들과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 그래도 어머니는 향나무 앞에 정화수 떠 놓고 우리 가족이 무사하길 비셨지."

 이 옹에게 향나무는 신처럼 떠받들어야 할 존재다.

 외조부가 돌아가시고 외가 쪽 사촌들이 선산을 팔아 종중묘를 이장해 갔지만 그는 동네에 남았다. 지금까지 40여 년 이곳 마을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며 4남매를 무탈하게 키웠다. 그는 모두가 향나무가 지켜준 덕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전 이 마을에 유일한 기와집이었던 외가의 경우 마을을 등지고 떠난 뒤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더니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소식조차 끊겼다. 향나무 아래서 제를 올리던 풍습도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 지금은 간혹 무당들이 몰래 찾아와 굿을 지내는 게 의식의 전부다. 더욱이 나무 아래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빌라가 들어서 나무의 생육마저 위협받고 있다.

 이 씨 문중이 떠나고 마을의 행색도 기울어 몇 해 전부터 추진해 온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그래도 나무의 영험한 기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앞서 만난 김 할머니는 몇 해 전 국회의원 선거 때 야당 의원이 이곳에 찾아와 제를 올리겠다고 해서 허락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대신 나무에 올리는 첫 제수는 김 할머니의 큰아들이 따르는 조건이었다. 이후 이곳에서 첫 야당 의원이 당선됐는데 나무의 기를 받아서 그렇다는 게 김 할머니의 말이다.

 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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