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애달픈 인생 이야기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곳에 뿌리내린 사연들은 깊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인지라 그 속에서 묻어나는 곡절들은 옹골지다.

거기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굵은 거목(巨木)의 그림자처럼 그 긴 세월이 우려 낸 속사정들도 짙다. 그 얘기 타래의 한가운데에는 키 30m, 둘레 8.6m의 800여 년 묵은 은행나무(인천시기념물 제12호·남동구 장수동 63-6)가 서 있다.

장수동(長壽洞)은 원래 장자골(壯者里)과 만의골(晩宜里), 무넘이(水越里) 등 3개 마을로 이뤄진 동네다.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 만의골이다.

그 이름의 사연 또한 이채롭다. 만의골은 뒤에 외곽순환도로가 뚫고 간 거마산(巨馬山·해발 209m)과 앞에는 인천대공원 안 관모산(冠官帽山·162m)·상아산(象牙山·151m)으로 둘러싸인 ‘느직한 골짜기’다. 그래서 ‘느직골’이라고도 불렀다. ‘느직하다’를 한자로 풀어내면서 ‘늦을 만(晩)’자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의(宜)’는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별 뜻 없이 붙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만의골의 형세는 산속 요새와 다름없다. 고려와 조선시대부터 군부대가 있었다. 그 부대장의 별호가 ‘만호’였다는 것이다. 만호골이 만이로 변했고, 또다시 만의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 인천대공원 호수
만의골에는 지금도 특수부대인 9공수가 있다. 본디 장수동의 장수는 긴 수명을 뜻하는 ‘長壽’가 아니었다. 힘 센 장정을 말하는 ‘장(壯)’자에다가 수월리의 ‘물 수(水)’를 써서 ‘장수동(壯水洞)’이었다.

역시 곡절이 빚어낸 지명이다. 장수동은 옛날부터 먹고살 만한 마을이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만든 지도를 보면 또렷하다. 거마산 바로 밑 만의골에서 무넘이 마을을 타고 만수6동 담방마을까지 너른 논이었다.

그 논은 수산동을 거쳐 서창동까지 이어졌다. 인천대공원 후문으로 가는 진입도로 인근에 추어탕 집들이 몰려 있는 까닭도 이 드넓은 논 때문이다. 30여 년 전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탕으로 끓여 먹던 이들이 가게를 내면서 10여 군데의 추어탕 가게 촌으로 번진 것이다.

웬만큼 사는 장수동 사람들은 구월동과 남촌동에 땅을 갖고 있었다. 가을 추수 시가가 되면 부잣집 대문으로 이어지는 우마차 행렬의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였다. 나라 살림이 곤궁해지자 지방에는 도적떼가 활개를 쳤다. 넉넉했던 장수동이 표적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어느 날 동네 주막에 수상쩍은 장정들이 술판을 벌이며 일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주모는 남편을 시켜 이 사실을 동네 청년들에게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스름한 밤기운이 퍼지자 이 장정들은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해댔다. 이때 동네 청년들이 나타나 도적들을 잡아 포도청에 넘겼다. 이때부터 마을은 힘 센 사람을 의미하는 ‘장자(壯者)골’로 이름 지어졌다.

‘무넘이’의 사연도 깊다. 부평구 황굴(일신동)로 이어지는 외곽순환도로의 자리가 무넘이 고개다. 조선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제안한 경인운하 공사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부평 뜰의 땅파기는 간석오거리에서 부평가족공원으로 넘어가는 원통이 고개에서 꽉 막혔다. 커다란 암반이 박혀 있던 탓이다. 김안로는 땅을 치며 원통(寃痛)해 하다가 물길을 돌려 땅을 파기로 했다. 황굴에서 9공수를 지나는 외곽순환도로 고갯길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 땅속에 큰 바위들이 묻혀 있어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파낸 고개로 물이 지나간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무넘이골, 수월리(水越里)였다.

▲ 장수동 은행나무 앞 안내문.
부평구 일신동 황골로 넘어가는 재는 무넘이 고개 말고 또 하나 있다. 만수동 쪽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다. 이 재의 이름은 ‘별리현(別離峴)’, ‘별루현(別淚峴)’. 비루 고개다. 그 옛날 서울에서 인천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주 먼 옛적 우리나라 사신들은 중국을 갈 때 지금의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 동쪽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탔다. 사신들은 능허대에 다다르기 전 비루 고개를 넘고,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 문학터널이 있는 ‘사모지 고개(三呼峴)’를 거쳐야 했다. 남편과 아버지를 중국으로 떠나 보내야만 했던 아내와 자식들은 서울에서 따라와 이곳 비루 고개에서 이별의 정을 나누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비루 고개의 연유다.

장수동 은행나무 앞에는 지금도 개울이 지나가고 있다. 이 냇물은 인천대공원 호수로 흘러들어 간 뒤 장수천을 따라 소래 갯골로 빠진다. 인천대공원의 호수는 멀찍이 떨어진 남구 학익동 OCI(옛 동양제철화학)와 인연이 닿아 있다. 4만6천200㎡에 이르는 이 호수에는 100억 원가량 OCI의 돈이 들어 있다.

사연은 이렇다. 2003년 12월 31일 인천시·남구·OCI·폐석회 적정 처리를 위한 시민위원회 등 4자는 협약서에 서명했다. OCI의 폐석회 전량을 지금 체육공원으로 꾸미고 있는 바닷물 저수지(34만6천596㎡)에 모두 매립한다는 내용이다.

OCI의 폐석회는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인천의 해묵은 골칫덩어리였다. OCI 인천공장은 1968년부터 석회석과 소금을 원료로 소다회를 독점 생산하면서 부산물인 폐석회 수백만㎥를 쌓아 놓고 있었다. 40여 년 가까이 발생한 폐석회 양은 땅속에 묻힌 116만㎥를 포함해 모두 596만㎥에 달했다. OCI가 폐석회 매립으로 없어지는 바닷물 저수지 대신 인천대공원 호수를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한 것이다.

장수천의 끝자락은 소래습지생태공원에 닿는다. 지금이야 공원으로 조성됐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염전이다. ‘짠물’ 인천의 태동과도 무관치 않다.

▲ 소래습지생태공원 염부들이 천일염을 채취하고있다.
일제 때 남동구(남촌면)에는 공동 운영하던 제염소를 포함해 총 25명의 제염업자와 24군데의 제염소가 있었다. 인천 전체 염전의 총면적은 34만6천717㎡였고, 염전은 281개였다. 남촌면의 소금 생산량은 인천부 전체 생산량 215만4천780㎏의 54%인 116만3천581㎏이었다. 남동염전 300만㎡(1·3구)는 1920년 9월에 시작돼 1921년 준공됐다. 또한 1921년 4월에 시작한 남동염전 2구 105만㎡는 그해 12월에 준공됐다. 투입된 예산은 80만347원이다.

남동염전이 조업을 시작한 1922년 당시 근무자는 관리자를 빼고 모두 283명이었다. 염부장 13명과 염부 270명이다. 소래염전 1구와 2구는 1934년 6월에, 3구는 1935년 1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지금 남동구 서창동 앞에 1구인 140만㎡를, 시흥시 월곶 북쪽 갯벌 2구인 216만㎡, 시흥 방산동과 포동 앞에 3구인 193만㎡를 조성했다.

남동염전은 ‘꼬마 열차’라 불리던 수인선 협궤열차가 기적소리를 만들어 냈다. 조선경동철도㈜는 1935년 9월 23일 착공한 수인선 수원역~남인천역 간 52㎞의 부설공사를 2년 만에 끝냈다.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1970년 인천시는 남동염전을 매립하는 내용으로 도시계획을 수립했다. 1970년대 중반 수출산업 7공단 건설은 남동염전을 염두에 둔 계획이다. 1985년 시작해 1992년에 끝낸 760만3천340㎡의 남동공단 조성의 전조였다. 소래 염전 1구는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조성됐다.

글=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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