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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오래전부터 다른 어떤 지역보다 도시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지난 역사 속에 응축된 다양한 경험이 인천인들에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는 지역 탐구의 역동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동성’, 이것이야말로 인천의 특징이자 정체성의 바탕이다.

 인천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강화 고인돌군을 비롯해 고대 중국으로 가는 최초의 뱃길 능허대, 고려 왕실의 유향이 서린 왕릉과 제2의 수도였던 강화도에서의 팔만대장경 조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와 왕실 도서관 외규장각, 민족정신을 온존시킨 강화학파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 1883년 제물포 개항으로 근대문물이 이입되자 해관, 호텔, 공원, 등대 등 각양각색의 건축물과 시설들이 최초로 조성됐다. 일제강점기 질곡의 세월과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시가 초토화되는 재난도 겪었고, 그 복구를 위해 1960·70년대 산업화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현장이 됐던 공간이다.

 당시는 경제 재건이 우선적이었기에 역사문화에 대한 사회전반의 인식이 부족했음에도 지역에 애정을 가진 향토사가들은 인천이 겪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에 주목했고, 지역사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개인의 저작으로부터 시사(市史) 편찬에 이르기까지 탐구와 기록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그런 과정에서 인천은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로 발전했고, 조선 후기(1899) 2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30년이 지난 2016년 현재, 300만에 이르렀다.

 광역시로 확장되면서 인천을 보다 적확하게 알릴 수 있는 상징적 주제로 ‘최초’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실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천 연구자와 향토사가들이 전거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찾고 이러한 사례들을 정리해 10년 전 「근대 문화로 읽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책자가 발간됐다.

그리고 당시에 채 담아 내지 못했던 전근대까지 포함한 2030여 년 인천 역사를 ‘최초’라는 주제로 새롭게 엮어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으로 증보됐다.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가 되는 사실들을 정리한 것이다. 무엇보다 인천 시민들이 역사 속에서 ‘인천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보다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 역사의 켜가 쌓여 당연하게 생각한 사실들 속에 새롭게 규명되는 사례가 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인천에서 체결된 이야기는 많은 인천인들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체결 장소는 오랫동안 논의가 분분했다. 최근 새로운 전거 자료가 발견되고 이를 바탕으로 체결 장소를 재정립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 바 있다. 여기에서 제기된 또 하나의 ‘최초’ 사례가 태극기에 관한 것이다.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지금의 자유공원 청일조계경계계단 위 언덕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지시했고, 8괘의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지금과 같은 4괘 태극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에 수신사로 가는 배 안이었다. 다음 해(1883) 태극기가 조선의 정식 국기로 채택됐고, 1949년 10월 국기로 지정됐다.

 인천지역사회에서 ‘최초’의 사실(史實)들은 오랫동안 회자돼 왔다. 지금도 인천의 역사적 가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혹자는 ‘최초’에 대한 사례들이 근대 이후에 치우친 면이 있어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우려하기도 하고, 또는 지나치게 강조되는 ‘최초’의 의미에 식상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천 역사에서의 ‘최초’사례들은 우리에게 수레바퀴의 앞과 뒤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 역사의 교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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