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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 수필가
부기2급, 주산2급, 타자3급, 펜글씨3급의 자격증에 성적까지 상위권이면 최적의 스펙이었다. 일명 2233이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들어가니 상업계산 등 모든 과목에 ‘상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생소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해 들뜨거나 설렘이 일지 않았다. 빨리 시간이 흘러 그 시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입학과 동시에 친구들은 2233을 취득하기 위해 부기학원으로, 타자학원으로 동동거리며 들락거렸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학한 나는 멀뚱멀뚱 공상만 했다. 취업담당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빽’이 든든하거나, 돈이 많거나, 얼굴이 기막히게 예쁘거나…, 이 세 가지 중 아무 것도 없으면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공부마저 못하면 죽어야 해!"

 당연히 우스개로 하는 말씀이었고 듣는 우리는 책상을 두드리며, 짝꿍 얼굴을 가여워하며 깔깔댔다.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취업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전문대학 졸업자도 많아졌고, 인문계고등학교에서조차 대학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직 공부를 시키는 취업반이 따로 생겨났다.

 반드시 상업 전공자를 필요로 하는 곳을 제외하곤 오히려 호봉 낮은 인문계고등학교 졸업생을 선호했다. 또한 상업고등학교 졸업생 대신, 조금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한 전문대학 출신자를 뽑는 비중도 높아졌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취업담당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마땅했다. 목울대가 불거지도록 힘주어 말했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 창밖만 보던 내겐 먼 얘기였다.

 상업고등학교 공부에 익숙해지는 데는 1년이 걸렸다. 나는 갖추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빽’이라곤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을 해야만 하는 엄마가 전부였고, 돈은 기한 내에 교납금 내기도 버거웠다.

 기막히게 예쁜 얼굴은 열 번을 다시 태어나면 가능할까. 취업을 하기 위한 희망이라곤 공부밖에 없는데, 상업 관련 어휘들이 떠도는 먼지 같기만 했다.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하겠고 외워지지 않았다. 특히 타자치기가 제일 힘들었다.

친구들은 원고만 보면서도 타닥타닥 잘도 치건만, 나는 자판을 보지 않으면 전부 오타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원고를 두세 줄씩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판을 보면서 쳤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2학년 때 2233을 만들어냈다. 차츰 현실을 지각하고 노력했지만 내 2233 결과는 별로였다. 부기와 주산은 해결했는데 타자와 펜글씨는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3학년 때 4벌식이던 타자기가 컴퓨터와 동일한 2벌식 자판배열 구조로 바뀌었다. 종성을 치려면 일일이 눌러야 했던 Shift키의 사용이 줄어들자, 드디어 3급을 땄다. 그러나 펜글씨는 졸업할 때까지 4급이었다.

 올해 하반기 공채 일정이 하나 둘 발표되고 있다. 모집 인원이 작년 대비 전체적으로 줄었다. 채용 인원은 줄었는데 채용 기준은 더욱 강화됐다. 직종과 무관하게 완벽한 영어 구사는 물론이고 논술에 프레젠테이션 능력까지 그야말로 전천후 인재를 원한다.

서류접수를 시작으로 적성검사와 몇 번에 걸친 면접을 거쳐 최종합격까지 두세 달이 걸리는 긴 과정이다. 기업마다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한 자격 요건들을 훑어보니 그 옛날의 2233으로는 입사할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 기업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험난한 과정을 겪는 세대가 안쓰럽다.

 최적의 조건이었던 2233을 만들지 못했던 내 실력으로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면접관 앞에 책이 몇 권 놓여있었고, 이 중에서 읽은 게 있냐고 물었다.

네 권은 제목도 생소한 거였는데 다행히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있었다. 자연스레 책 내용으로 대화가 이어졌고 4급에 머물러 있던 형편없는 내 글씨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읽고 싶은 책, 듣고 싶은 음악, 보고 싶은 영화 등을 취향대로 누린 우리 세대였다. 비록 충분하진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초조와 불안을 해소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하고 싶은 취미는 물론이고 누리고 싶은 문화조차도 구직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씁쓸한 얘기를 듣는다. 부디 책 한 권, 영화 한 편, 노래 한 곡으로도 취업이 가능한 날이 올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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