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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0년 된 용궁사 느티나무. 왼쪽이 할아버지나무, 오른쪽이 할머니나무로 불린다.
‘사랑했기 때문에 천년이 가도 잊을 수 없다’는 노랫말이 있다.

‘천년의 사랑’ 그 영겁의 시간을 애절한 노래로 들을 때만 해도 가슴 한 구석 전해오는 울림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천년을 넘게 사랑을 꽃피운 나무를 대할 때 느낌은 ‘감동’ 그 자체다.

 인천시 중구 운남동 66번지에 위치한 용궁사. 그곳엔 아주 특별한 나무 2그루가 있다. 1천3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의 수령도 놀랍지만 한자리에서 마주하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았다. 그래서 그 이름도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로 불린다.

 용궁사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백운사를 모체로 한다. 조선시대 철종 5년(1854년) 흥선대원군이 중창(重創)하면서 지금의 용궁사로 개칭한 것으로 전해진다.

# 사랑으로 꽃피운 무한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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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나무.
천년고찰 용궁사는 여느 큰 절에서 볼 수 있는 사왕천이 없다. 대신 2그루의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사찰 입구를 든든히 지키고 서 있다.

사찰 아래서 왼쪽에 자리한 것이 일명 할아버지나무다. 오른쪽에는 할머니나무가 마주하고 있다.

할아버지나무는 높이 20m에 가슴높이 둘레가 5.63m에 달한다. 할머니나무는 이보다 작은 10m 높이지만 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 한쪽은 고사돼 반쪽만 남았다. 그마저도 최근 벼락을 맞아 죽은 반쪽은 밑동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등 굽어 왜소해 보이는 노파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할아버지나무의 줄기가 할머니나무 쪽으로 뻗어 있다. 마치 할머니나무의 손이라도 잡겠다는 심정인 듯 유난히 그쪽으로 향한 잎이 짙고 푸르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오랜 기간 내외한 노부부 같다. 예전에 나무가 젊었을 때는 더 많은 가지가 할머니나무 쪽으로 뻗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절을 찾는 이들은 나무에 붙여진 이름처럼 서로를 의지해 세월에 무감각한 듯 노부부의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고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가 이들 나무에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려 아이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이 때문에 전해진다.

또 암수 꽃을 피우는 느티나무에 원래 성이 없는데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로 구분한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의 성(性)에 대한 인식도 엿볼 수 있다. 큰 키에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나무를 남성에, 키가 작고 줄기가 둘로 갈라져 다소곳한 형태의 나무를 여성에 비유한 것이 재밌다.

특히 줄기의 상당 부분을 충전물로 메운 수술 흔적과 지지대 여러 개로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나뭇가지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노인을 연상케 한다.

천년을 넘게 반복해 온 일이지만 지금도 이들 나무는 매년 새순을 키워 5월에 꽃을 피운다.

인천시는 이들 나무를 기념물 제9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 소원을 말해봐

사찰은 원래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느티나무는 부처님 못지않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스님들도 마시지 못하는 곡주(막걸리)를 이들 나무는 한 해 20말씩 먹어 치우는 호사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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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사 주지 능해스님.
용궁사 작은스님으로 불리는 원경스님은 "매년 꽃이 피는 5월과 잎이 무성한 가을에 막걸리를 사다 나무에 뿌려 준다"고 했다.

절을 찾는 불자들 중 상당수도 부처님 앞에 불공을 드리기 전 이들 느티나무 앞에서 합장을 하고 예를 올린다. 불자가 아닌 이들도 절을 찾아 부처 대신 나무 앞에서 간절히 소원을 빌 정도다.

비록 나무가 절터에 있지만 평범한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는 일종의 수호신이자 제를 올리는 당산나무인 셈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이곳 절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바위’도 있다. 주먹 크기의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고 정성껏 삼배를 올린 뒤 바위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자석에 붙는 듯한 느낌이 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설이 구전으로 전해진다.

인근 인천공항을 오가는 외국인들에게까지 이 같은 얘기가 알려져 지금은 동남아권 환승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 소가 됐다.

용궁사 주지인 능해스님은 "절에서 부처가 아닌 미물에 공을 드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리 하겠다는데 그걸 어찌 말릴 수 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삼라만상’ 모두가 불상이고 그 안에 담긴 불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역시 불가의 도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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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나무에 소원을 적은 기왓장이 수북히 쌓여 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설파한 원효대사 역시 천 년 전 이곳 절을 창건하며 그와 같은 뜻을 품었을 것이다.

세도정치의 풍랑을 피해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흥선대원군 역시 오래된 노거수(老巨樹) 한 쌍에 복잡한 마음을 의지했을 것이다. 큰스님이 머무는 요사채에는 당시 흥선대원군이 쓴 ‘龍宮寺(용궁사)’ 친필 편액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난 4월부터 할머니나무 뒤편 절터에 대웅전 공사가 한창이지만 최근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돼 문화재 발굴조사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 천년의 세월을 잉태한 나무

할아버지나무는 줄기의 절반 이상이 썩어 충전물로 채워졌다. 할머니나무 역시 몸통의 반이 벼락을 맞아 사라졌다. 하지만 질긴 이들 나무의 생명력은 또 다른 생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할아버지나무 줄기에서 움이 트고, 반쪽만 남은 할머니나무에서 잎이 다시 풍성하게 우거졌다.

능해스님은 이들 나무가 앞으로 천년은 더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정 많은 부부처럼 매년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돌보는 듯 주변이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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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사 소원바위.
단지 우려되는 것은 이들 노거수 주위에 회양목과 철쭉 등 관목과 왕벚나무 등 교목이 너무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풍 산림사업자문위원(인천산림조합)은 "노거수 주위에 너무 많은 잡목이 자라게 되면 경쟁관계가 형성돼 영양분을 빼앗길 수 있다"며 "가급적 경쟁관계인 나무는 멀리 이식해 노거수가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천년의 사랑’이란 노랫말처럼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은 노거수 한 쌍이 앞으로도 오랜 기간 ‘사랑의 힘’으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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