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도 영주 태생이지만, 나는 인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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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는 완전한 인천 사람이야. 말은 아직 경상도 말을 쓰지만, 누가 ‘당신 인천 사람 아니지 않소’ 하면 ‘나는 당신 태어나기도 전에 인천에 왔네’ 그래. 한 60년을 인천에서 살았으니까. 인천은 진짜 특수한 곳이야. 마치 미국의 LA처럼 말이지. 한 도시에 이렇게 각지 사람들이 모이기가 드물거든. 대구나 부산만 가도 그 지역 사람 아니면 행세를 못 해. 하지만 인천은 그런 게 없잖아. 바로 이게 인천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한 거야."

정해영 인천상공회의소 중·동구경영자협의회 회장은 80년 전인 1936년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태어났다. 정 회장은 자신을 ‘인천 사람’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정 회장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7년 대한민국 산업 역군의 한 명으로 인천에 올라왔다. 그는 현대제철의 전신인 대한중공업공사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인천에 살면서 화수동에 처가를 둔 아내를 만났고, 쌍둥이까지 포함해 1남 3녀를 키웠다. 인천에서만 살아온 세월이 근 60년이다. 인천은 지금 그의 고향이다. 인천에서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보낸 정 회장은 전·현직 이력만 수십 가지다. 모두 지역과 연관된 일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1957년 대한중공업공사에 입사한 정 회장은 이듬 해 군 복무에 들어가 1960년 상호를 변경한 인천중공업에 재입사한다. 약 10년이 지난 1969년부터 인천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맡아 노동 운동을 시작했고, 지역에 발을 넓혀 간다. 인천시 노동협회 및 노사문제연구원 회장, 민주평통 부평구협의회 회장, 현대제철 동우회 총회장,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인천지검 범죄피해방지위원, 인천 유나이티드 시민프로축구단 운영위원, 전국문화원연합회 인천시 특별위원, 2009년 인천도시축전 조직위원,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유치위원, 인천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인천발전자문위원, 인천대 부지 확정 추진위원 등을 역임했다.

아직도 거론하지 못한 경력이 십수 개다. 지금까지 맡고 있는 직책만 해도 10여 개에 달한다. 1992년 설립한 철우기업 대표를 비롯해 새얼문화재단 지도위원, 국제로타리 3690지구 인천주안로타리클럽 회장, 상의 중·동구경영자협의회 회장, 인천상공회의소 감사, 가천길재단 미추홀봉사단 이사 및 감사, 부평문화원 이사, 인천경영포럼 상임고문 등은 현재까지도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여느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가 지금 ‘인천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 인천의 옛 모습. 천막 동인천역사와 미림극장

정 회장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영주에서 살다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거야. 지역이 후방이긴 하지만 전방보다 더 심할 정도로 전투가 있었지. 태백산과 소백산 밑이 영주인데, 당시 전투사령부가 태백산에 있었어. 공비들이 엄청 많았지. 한국전쟁이 나고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군인들이 많이 죽었어. 우리 나이 위로는 학도병으로 다 나갔기 때문에 우리가 시신을 치워야 했어. 치열하게 전쟁을 겪었지."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 회장은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곧바로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산업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지금 현대제철의 전신인 대한중공업공사에 들어갔어. 한국전쟁이 끝나고 38선이 갈리고 나자 남쪽에서는 철강을 생산하는 공장이 없었어. 철이 국가의 기간산업인데 말이야.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인천에 철을 다루는 대한중공업공사가 발족하게 된 거야. 처음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곳이었지. 독일에서 기계도 들이고, 당시 상공부 장관이 직접 현장에 와서 진두지휘했어.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철강회사인 거야."

대한중공업공사에 취업한 정 회장은 회사 근처인 송현동에 방을 하나 얻어 인천 생활을 시작했다.

"송현동과 수도국산 일대에는 피란민들이 전부 정착해서 빈민 소굴이었어. 나도 방 한 칸 얻어서 잠을 잤지. 심지어 만석동 일부에서는 땅굴을 파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어. 동인천역도 역사가 없었어. 군인들이 천막을 쳐서 동인천역에 있었고 거기서 기차가 내렸지. 요즘 미림극장 있지? 거기도 건물 대신 천막으로 돼 있었어. 그래도 극장이라고 천막 안에서 영화를 돌리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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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인천중공업(주)과 인천제철(주) 합병 후 통합노조위원장 취임식.
정 회장이 인천에 발을 디딜 당시에는 숭의로터리까지도 변두리였다. 부평은 말할 것도 없는 다른 지역이었다. 당시 부평에 가려면 ‘원태이고개’(현 인천교통공사 인근)를 넘어야 했다. 인천에서 부평으로 이어진 유일한 고개였는데, 행인들의 돈을 뺏는 도둑들도 있었다고. 때문에 일부 시민들은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게 정 회장의 기억이다.

"화수동, 만석동이 다 초가집이었어. 특히 화수동과 전동에 인천 원토박이들이 많이 살았지. 만석동에는 피란민들이 많이 있었고. 철도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거야. 당시 인천의 모습이지."

# 서울의 관문 아닌 자주적 인천 발전 이뤄야

1960년 육군 측지부대를 제대한 정 회장은 대한중공업공사에서 이름을 바꾼 인천중공업에 재입사했고, 2년 후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62년에 결혼했어. 인천 여자를 얻었지. 화수동이 처가였어. 우리 집사람은 본토 인천 사람이었거든. 4남매를 뒀는데, 딸 둘 놓고 쌍둥이를 봤어. 아들 하나, 딸 하나. 지금은 애들 모두 시집·장가 다 가서 잘 살고 있지."

이후 1969년부터 인천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맡으며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한다. "60년대, 70년대 노동운동은 기업을 살리는 개념이었어. 지금처럼 회사에 노동자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동조합과는 달랐지. 대한민국이 한창 성장할 때였으니까. 우리도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 그랬어. 독일의 성장 과정을 보고 한국 노동운동에 접목하는 교육도 받았지. 당시의 노동운동이 경제를 살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봐."

정년으로 회사생활을 마친 그는 고(故) 정주영 회장과 인연이 닿아 정치권에도 발을 딛게 됐고, 지역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선다. "인천에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정말 놀랄 정도야. 지금 인천 인구가 곧 300만 명이라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인천이 이렇게 발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인천이 가진 장점이 있어. 공항도 있고 항만도 있고. 부산에서 인천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는 매립이 가능하다는 거야. 송도국제도시 봐. 이렇게 발전될 줄 몰랐지. 한 모임에서 하는 말이 ‘인천을 누가 이렇게 발전시켰느냐’고 물으면 ‘우리도 일조했다. 인천을 발전시킨 구성원이다’라고 말해. 다만 지금 인천이 부채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데, 유정복 시장이 잘 할 것으로 봐."

인천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천이 더 이상 서울의 관문이 아닌 자주적인 도시로, 특히 아이들의 교육이 타 지역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도시가 됐으면 하는 게 정 회장의 바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을 선호해. 타 시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천 교육이 발전해야 한다고 봐. 오히려 서울 사람들이 애들 교육을 위해 인천으로 오게 만들어야지. 인천은 공항과 항만을 다 갖추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서울의 관문이 아닌 인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추세로 간다면 분명히 인천은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거야."

 글=이병기 기자 / 사진=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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