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도시 인천, 혼자가 아닌 같이 가야 합니다." 이강일(74)나사렛의료재단 이사장이 인천에 던지는 화두는 ‘동행(同行)’이다. 같이 길을 간다는 뜻의 이 단어는 인천에 참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인천은 전국 팔도의 지역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도시다. 이 이사장은 "혼자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며 "모두가 힘을 합쳐 인천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말한다.

청·장년 시기에 꿈 보따리를 품고 인천에 올라 왔던 그의 ‘인천 정착기’를 들어 봤다.

# 학창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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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장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이용리 출신이다. 지리산 서쪽 두 마리 용이란 뜻의 이곳에서 1942년 태어났다. "아주 시골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좋았죠. 남원 시내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차도 없어서 걸어다니곤 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니다가 중학교는 전주로, 고등학교는 서울로 다녔다. 가정 형편이 좋아 대도시로 갔던 것은 아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형은 대학을 보내는데, 너는 중학교 졸업하면 내려 와서 농사를 지어라’라고요." 아들 둘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고등학교 진학을 막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대신 단서가 하나 있었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교통고등학교(현 용산공업고등학교)에 합격하면 고등학교를 보내 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지을까, 아니면 아버지 말씀대로 교통고등학교에 들어갈까. 당시 교통고등학교는 학비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월급도 줬고요. 학교를 졸업하면 공무원이 될 수 있으니 입학 경쟁률이 어마어마했죠. 제가 들어갈 때만 해도 24대 1이었으니 엄청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1960년 4·19혁명,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4·19혁명에는 저도 동참했습니다. 남대문에서 시위를 하다가 장갑차가 들이닥쳤고 사람들이 차를 피하는 모습, 총에 맞아 쓰러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비참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는 취업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다. 하지만 군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월남전 파병.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1년간 베트남에 머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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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인 아내와 이강일 나사렛의료재단 이사장(왼쪽)

# 청년 시절

그는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교통고등학교 출신을 대상으로 한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50명을 뽑는 시험에 합격해 정말 기뻤다고 한다. 1967년 즈음 철도공무원으로 임용됐고, 청량리역에서 근무를 시작해 1년 뒤 서울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는 서울역 매표소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의술을 펼치면 존경받는다’는 말이었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의술을 가지고 무료로 동네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었는데 당시에 계속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한의사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일을 하면서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진학했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근무체계라 쉬는 날에 학교를 갔습니다. 근무가 있는 날이면 동료들이 다들 밤 근무를 싫어하니까 제가 밤 근무를 맡아서 다하고, 낮에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를 했죠. 그렇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졸업을 2년 남기고 사직서를 제출해 학업에 집중했고 한의사가 됐습니다."

전주에 내려가서 한의원을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같이 근무했던 아내가 전북대 의과대학에 합격하면서 함께 전주로 내려가 6년간 학업 뒷바라지를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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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이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 인천 시절

남편은 한방, 아내는 양방 의사가 됐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의사로 일하던 부부는 1981년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에 ‘나사렛 한의원, 나사렛 의원’을 열었다. 양·한방 협진 시스템을 구축한 병원이었다.

"1981년 당시 인천 인구가 8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반 주택도 띄엄띄엄 있었고, 백화점도 ‘희망백화점’ 한 곳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간석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신시가지가 형성됐고, 저희 부부는 양방과 한방을 협진하는 전국 최초의 병원을 만들었습니다."

환자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한국인의 3대 사망 원인 중 하나인 뇌졸중의 경우 예방과 응급치료는 서양 의학이, 마비와 같은 합병증 치료는 한방 의학이 효과적이라 서로 교류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찾아냈다.

병원은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고, 의료법인 나사렛의료재단도 설립했다.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의료법인 나사렛의료재단 나사렛국제병원은 뇌혈관센터, 관절척추센터, 여성·소아센터, 응급의료센터 등 총 8개 전문센터를 통해 35년의 의료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23개 진료과와 45명의 전문의가 진료하는 종합병원으로, 체계적인 의학·한의학·통합기능의학 진료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 그리고 인천은

의사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그는 지역사회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 1993년 한약 분쟁 당시 인천시한의사회 회장을 맡아 한의학 담당과 설치, 한의학연구소 설립, 한의사 공중보건의, 군의관 배치 등의 성과를 거뒀다.

2000년 국제라이온스협회 인천지구 총재로 일하면서 지역사회 소외된 이웃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와 함께 서해안 섬을 돌며 의료봉사활동을 펼쳤고, 해외 저소득층 어린이 환자를 위한 인술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인천과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 꿈과 희망을 전달하고 있는 이 이사장.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도시 인천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인천에 자리잡은 지 35년째입니다. 그 사이 인천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인구가 8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요즘 인천은 경제적인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시민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예술 정책에도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너무 현대문화에만 집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악과 탈춤, 한옥이나 한복과 같은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거죠.

저는 우리 고유의 것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대문화는 어떤 나라에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문화는 다르죠. 인천 송도나 영종도에 전통민속촌을 만들면 어떨까요. 외국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잠도 자고 전통놀이도 할 수 있게 하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경거리가 없어 늘 고민인 인천에 꼭 필요한 관광상품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글=조현경 기자 / 사진=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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