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300만 도시 인천을 넘어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쟁력 있는 도시를 꿈꿔야 할 때입니다."

이우영(61)재단법인 글로벌에듀 이사장이 ‘인천’에 전하는 말이다. 충청도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인천에 정착해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누구보다 ‘인천’이라는 도시에 애정이 많다.

‘제2의 고향’인 인천에 수많은 직업교육기관을 설립해 후학 양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 이사장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인천에 대한 애정의 한 축이다.

"처음 인천에 올라왔을 때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도시에서 눈부신 성장을 통해 300만 도시로 우뚝 선 인천은 대한민국에서 다시 없을 마지막 도시일 것입니다. 그런 만큼 300만 도시 인천이 갖는 잠재력과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산업화를 거쳐 2000년대 정보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인천’이란 삶의 터전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 온 그에게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들어 봤다.

# 인천에 자리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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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장은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인 1960년대 중반 인천에 올라왔다. 남구 도화동에 위치한 선인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팔봉에 ‘구도항’이라는 항이 있는데, 거기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가 있었어요. ‘칠복호’라고 목선이었죠. 그걸 타고 하인천까지 올라왔습니다. 부모님은 서산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혈혈단신 혼자 인천으로 올라와 시집 간 누나 집에 얹혀살았죠."

당시 인천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가 거주하던 송림동에는 판잣집이 많았다. 만석부두에 널려 있던 생선을 담는 나무 궤짝을 주어다가 뜯어서 불을 때고 살아가는 집도 많았다.

이 이사장은 "시골보다 환경이 더 열악했던 것 같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런 도시의 모습 속에서 눈길을 끈 것은 학교 건물이었다.

"서산 팔봉에 있을 때는 단층짜리 집만 봤지, 2층 이상 되는 건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 와 보니 8층짜리 건물이 있는 것이었어요. 바로 제가 다닌 선인중학교 건물이었죠. 아마 당시에 인천에서도 제일 높은 건물이었을 겁니다. 하도 신기해서 건물 층수를 세어 보고 또 세어 보고…. 한참이나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 교육에 눈뜨다

선인중학교에서 보낸 학창시절은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를 교육자의 길로 이끈 중요한 토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지금 ‘특성화 교육’이라고 하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지만 1960년대에 특성화 교육이라 하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특성화 교육’이란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요. 학교에서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느냐면 지반, 인반, 선반, 용반으로 반을 나눠 공부 잘하는 애들은 지반에, 음악을 잘하는 애들은 인반에, 그리고 선반에는 미술을, 용반에는 운동을 잘하는 애들을 모아 넣고 학생들 특성에 맞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어떤 학교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었던 거죠."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식의 기존 교육 방식이 아닌 학생 위주로 생각하고 학생 위주의 교육을 실현하는 모습에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때 받은 감동은 그의 눈과 귀와 발걸음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고, 전공을 살려 운봉공업고등학교(현 인천하이텍고등학교, 남구 도화동) 전자과 교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이상과 다른 현실의 한계에 곧바로 부딪혔다. "교사들이 학생 탓을 하는 겁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전체 30∼40%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60∼70%는 대학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었는데, 이런 학생들을 두고 너희들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못 간 것이라고 학생 탓을 하는 겁니다. 교육자가 뭡니까. 잘하는 아이는 더 잘하게 만들어 주고, 못하는 아이는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 팔봉전산직업훈련원 건립을 위한 설명회

그래서 결심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 잘 못하는 아이 모두를 위한 교육을 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육, 즉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이라는 바탕에서 생각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행복일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자신이 하고 싶은 건 과연 뭘까. 그것은 바로 직업입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을 갖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직업교육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 인천을 명실상부한 ‘직업교육 도시’로

그는 1984년 재단법인 팔봉전산직업훈련원(현 글로벌에듀)을 만들며 인천을 명실상부한 직업교육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은 설립 4년 만인 1988년 한국 최초로 IBM 협력 교육기관으로 선정돼 미국으로부터 컴퓨터를 도입, 우리나라의 IT 교육을 이끌었다. 또 인천문예실용전문학교를 포함해 중앙직업전문학교, 경문실용전문학교, 인천영어마을, 인천서구영어마을 등 7개 고등교육기관과 식문화 복합 테마파크인 강화 식문화예술단지 등 5개 관련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직업훈련원을 만들 때만 해도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했습니다.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직업교육을 한다니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했죠. 더구나 컴퓨터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시작했고 결국 성공했다.

"올해는 팔봉전산직업훈련원을 설립한 지 3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사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직업교육을 받았죠. 인천의 전산 관련 직업을 가진 40∼50대 중 80%는 팔봉 출신일 겁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파티플래너 교육을 시작해 현재 활동 중인 파티플래너의 60∼70%가 우리 학교 출신일 겁니다. 국내뿐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합숙식 영어교육기관인 ‘PBI 연수원’을 만들고 미국 캘리포니아 힐드 칼리지, 남유타 대학 등과의 유학 산학협력을 통해 학생들의 국제사회 진출로까지 마련해 학생들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줬습니다."

▲ 1984년 개소식

# 인천의 미래는 사람, 그리고 교육

평생교육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일해 온 이 이사장은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인천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가 인천에 처음 왔던 1960년대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상상을 초월한 변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발전을 이룬 것이죠.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교육이 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이 필요합니다. 인천을 교육도시로 만들어 인재를 양성해야 하고, 전 세계에서 교육을 받으러 인천에 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천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천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누구 못지않은 교육을 통해 300만 도시 인천을 넘어 300만 명이 먹고살 수 있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글=조현경 기자 / 사진=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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