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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문화관광체육국장
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반복적인 오류는 반면교사를 관념 속에 가둬 두는데 있다.

 머리로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거듭 되뇌고 그 대화가 가리키는 바를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우악스러울 정도로 과거를 반복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진실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송사(宋史)’에 ‘대간사충(大姦似忠)’의 고사가 전하는데, 중국 송나라 신종 때 이른바 왕안석 신법으로 불리는 개혁정책을 두고 입장이 서로 다른 세력이 다투는 중에 한쪽이 상대방을 탄핵하며 올린 상소에 등장하는 말이다.

 ‘아주 간사한 사람은 충신과 닮았고, 큰 속임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쉬이 믿게 만든다(大姦似忠 大詐似信)’는 것이다.

 겉으론 소박하고 진실하게 보이는데 마음속에는 간사한 음모가 있고 이처럼 실로 간사한 사람은 언사가 교묘해 대개는 충직하다고 믿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처럼 ‘간’과 ‘충’은 바로 사람의 문제, 사람과 사람 간의 문제여서 사람들이 엮어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도드라져 보이기로는 권력관계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안방극장 드라마 속에는 힘의 중심(권력)을 공전하는 군상들이 늘 선명한 이분법으로 그려진다.

 충(忠)과 역(逆)이 그것이다. 대개 충은 선(善)으로 역은 악(惡)으로 등치된다. 드라마는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재연된다. 그러나 현재형인데다 더구나 전지적(全知的) 작가 시점이 애당초 불가능한 현실세계에서 이분법적 충과 역은 미혹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대간(大姦)을 감별하는 단초는 있게 마련인데 아무래도 그 첫째는 ‘위(危)’와 짝패를 이룬다.

 대체로 역사 속 대간(大姦)들은 위기 국면에서 등장해 입지를 다지는데 기실 그 위기를 위정자나 권력자로 하여금 절체절명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비결과 능력을 그들은 가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민심을 사려는 어떤 이도 위기를 논하지 않은 이가 없고 새로이 자리에 앉으려는 어떤 이도 위기 극복을 지상과제로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지 않은가.

 다음으로 대간을 결국 욕됨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욕(慾)’이다. 그들이 위기를 꾸미거나 부풀리고 이를 기화로 뜻한 바를 도모하려는 근저에는 언제나 주체할 수 없이 꿈틀거리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대의명분에 부합하는 것이든 오로지 사사(私邪)한 것이든 일을 무리하게 밀어붙임으로써 결국에는 부작용을 낳게 되곤 한다.

 그리하여 결국 대간의 마지막 징후는 ‘독(獨)’이 된다. 대간의 욕망은 이를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욕망의 끝은 다른 색깔과 다른 관점을 차례로 배제시키고 홀로 힘의 중심에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네트워크와 관계가 단절되고 사상된 고립무원의 힘은 결국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고립무원의 힘은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지는 소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개인적으로 진한 슬픔은 한순간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생각나서 가슴을 저미는 칼날이 되고, 역사적으로 대과(大過)는 한순간 후회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된다. 개인이든 크고 작은 권력이든 뭐든 ‘진실한 사람’에 대해 역사가 거듭 깨우치는 바다.

 그러므로 일을 크게 그르치는 대간보다야 눈꼴사납고 때론 측은하기는 해도 소간(小姦) 정도라면 그 하는 품을 그저 세상의 범사로 넘겨버릴 수도 있으련만. 우리는 누구이며 진실한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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