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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9·15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서는 여러 무용담이 전해내려 오지만, 지금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주 테마인 ‘X-Ray 작전’에 대해서는 실제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간 ‘인천상륙=맥아더’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이 세인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거대한 함선이 서해로부터 인천으로 접어들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 그리고 해저에 산재해 있는 모래톱과 갯벌 때문에, 덕적도와 영흥도 사이의 좁고 굴곡이 심한 2개 수로만이 허용될 뿐이었다. 이 2개의 수로가 팔미도 전방에서 하나로 합류된 후 15㎞를 지나 나타나는 곳이 월미도이다. 이 긴 수로의 형태와 수심은 기뢰(機雷) 부설에 안성맞춤이었는데, 특히 야간에 전투 함대가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자멸하는 것과 별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소규모의 병력과 빈약한 함정으로 고군분투하던 한국 해군은 7월 19일 미 해군사령관 작전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한국 해군은 별도의 기동 편성으로 연안작전을 전담하게 됐는데 그동안의 봉쇄, 경비, 도서 방위 등 방어적인 입장에서, 점차 공세적인 작전을 병행하게 됐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 반격작전이 시도되고 있었을 때 한국 해군은 서해 및 남해안의 도서들에 대해 일련의 기습 상륙을 감행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후일 ‘이작전(李作戰)’으로 불렸던 덕적도와 영흥도 상륙작전이었다.

이희정(李凞晶) 중령이 지휘하는 한국해군 단독의 이 상륙작전 부대는 8월 18일 덕적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했고, 8월 20일에는 영흥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덕적도에서는 적의 별다른 저항은 없었으나 영흥도의 상륙부대는 전사 4명 등의 손실을 본 뒤 8월 23일에야 상륙했다. 이 작전의 성공에 뒤이어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孫元一) 소장의 특별 지시를 받은 해군본부 정보감 함명수(咸明洙) 소령은 특수첩보부대를 영흥도에 후속 상륙시켜 활동을 개시하게 했다.

목표 지점에 대한 항공 사진과 포로 신문결과를 분석하고 인천 지역에 대해 잘 아는 미 육군 및 해군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이른바 ‘영흥도 첩보전’ 일명 X-Ray작전이 개시됐던 것이다.

 9월 1일 영흥도에 도착한 클라크 대위는 해군 첩보부대와 주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주민들로 조직된 영흥도청년방위대는 월미도를 관찰해 포 진지의 수와 위치를 알아오기도 했고 멀리 서울까지 침투해 적 부대의 위치와 규모를 탐지해 오기도 했다.

이러한 첩보들은 무전으로 극동미군사령부에 일일 보고됐음은 물론이다. 9월 10일께 팔미도를 정찰한 결과, 등대는 작동되지 않고 있었으나 모든 기재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확인 보고했는데, 첩보 결과에 따라 9월 14일 밤 자정에 등대를 밝히라는 사령부의 지시를 접수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바로 전인 9월 14일, 대부도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해왔고,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적의 공격을 차단했지만 정작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 죽음으로써 비밀 누설을 방지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기밀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이날 밤 클라크 대위와 켈로부대원들이 밤바다를 밝히는 팔미도등대의 점화를 보지도 못한 채였다.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두 군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했고, 우리 정부 역시 1954년 1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해 전공을 높이 평가했다. 인천상륙이 안전한 상황에서 작전을 진행시킨 것이 아니라, 적의 사정거리 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진한 용사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국 보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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