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땜므 몬트리올(J’aime Montreal)’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몬트리올은 사실 40년 전 우리나라에 올림픽 첫 금메달(양정모·레슬링)을 안겨 준 도시란 것 외에 별로 아는 게 없다.

# 판코폴리-불어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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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인트로렌스 강과 이어지는 라신운하(Canal de Lachine). 70년대 까지만 해도 급류를 타고 배가 지나는 운하여지만 폐쇄되면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주변 상가가 문을 닫았다. 이후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 예술인 주택협동조합 레자르가 형성된 배경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섭외가 힘들었던 몬트리올 ‘공연예술지구(쿼티 데 스페타클러)’의 한 곳인 플라스 데자르(Place des atrs)부터 찾았다. 플라스 데자르를 움직이는 공연예술지구 파트너십을 만나기 위해서다.

공식 인터뷰는 몬트리올 시정부에서 공연예술부장을 맡고 있는 미셸 피가드(Michele Picard)가 해 주기로 했다. 우리로 치면 인천시 문화체육예술관광국장인 셈이다.

그런데 그녀는 만나기로 했던 이날 오후 약속 시간을 다음 날 오전 8시 30분으로 미룰 수 있느냐며 양해를 구하는 이메일을 기자가 한국을 떠나기 전 보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행된 ‘판코폴리(FRANCOFOLIES)’ 행사의 행정적 책임을 그가 맡고 있어 이날도 낮 시간을 내주기가 힘든 사정이 있었다.

판코폴리는 매년 이곳에서 개최되는 음악 행사로 외형적인 모습만 볼 때는 인천의 록 페스티벌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와 성격은 큰 차이가 있다. 10일간 몬트리올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플라스 데자르(광장) 28개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모든 공연은 무료다. 시민 누구나가 즐길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불어에 미치다’란 의미의 페스티벌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공연은 불어로만 진행된다.

미셸 대신 행사 주관사의 한 직원(이름을 밝히길 원치 않음)에 따르면 행사 기간 오후 5시부터 자정까지 매일 불어권 문화의 아티스트 수백 명이 공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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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여름 몬트리올에서 개최되는 판코폴리(FRANCOFOLIES) 축제 포스터. ‘불어에 미치다’란 뜻을 갖고 있다.
마침 이곳에 머문 이틀은 퀘백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만 공연을 할 수 있다. 장르도 우리가 아는 감미로운 샹송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묵직한 비트의 헤비메탈과 함께 다양한 성격의 록과 랩, 그리고 대중적인 싱어송라이터부터 조금은 생소한 인디밴드들이 참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불어로만 즐기는 행사에 메인 스폰서는 미국 자동차회사인 포드다. 이 밖에도 귀에 익숙한 상호를 가진 다국적기업들이 후원을 하고 있다.

수익금은 전액 페스티벌에 참여한 아티스트 출연료로 지급된다. 몬트리올시와 퀘백주정부도 일부 예산을 지원한다.

공연은 저녁에 다시 보기로 하고 미셸의 소개로 소셜하우징 개념의 예술인 주택협동조합 레자르(Lezarts)를 방문했다. 레자르는 몬트리올시청에서 버스로 20여 분 떨어진 ‘빌르마히(Ville-Mane)’란 도심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곧 철거될 것만 같은 낡은 건물들 사이로 도로 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레자르는 몬트리올에서 가장 많은 시각예술가와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조합을 결성한 주거 공영 작업실이다.

몬트리올시 통계에 따르면 퀘백 지역의 시각예술 영역 46.5%가 몬트리올에 몰려 있다. 레자르가 들어서면서 유령 도시였던 빌르마히에 상가들이 다시 들어서고, 예술인 학교도 세워졌다. 일부 작업실은 국내 공방처럼 운영돼 미디어아트를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최근 이곳을 많이 찾는다는 게 현지 통역을 맡은 비비안(한국 이름 표연수)씨의 설명이다. ‘레자르’란 불어식 발음이 영어 리저드(lizard)와 유사한 탓인지 도마뱀을 형상화한 상호가 특이하다.

레자르 관리인은 만날 수 없었지만 입주 조건 등 운영 방식은 안내 게시판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가난한 예술인들의 주거 안정과 지속적인 예술활동이 가능하도록 임대료는 주변 지가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판코폴리(FRANCOFOLIES) 축제
데자르댕(신용협동조합)에서 장기주택자금을 대출해 조합원인 예술인에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임대료를 받아 갚아 나가는 모기지론 제도를 몬트리올시가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라신 운하(Canal de Lachine)가 지난다. 세인트로렌스강의 급류를 타고 배가 지나던 이곳 운하가 1970년대 폐쇄되면서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주변 상가가 문을 닫았다.

이후 가난한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 예술인 주택협동조합 레자르가 형성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은 운하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고, 한가롭게 물놀이를 즐기거나 동네 주민들 간의 커뮤니티인 바자회 등이 수시로 열린다.

# 아티스트를 품은 도시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사람들의 불어 사랑은 참으로 남다르다. 분명 시민 대다수가 불어와 함께 영어도 쓸 수 있지만 식당에 가면 영문 메뉴판을 먼저 부탁했는데도 굳이 영어로 얘기해 달라고 하기 전에는 불어로 주문을 받는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파리지엔’인 양 자신들만의 문화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몬트리올의 역사를 알면 그도 무리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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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면 몬트리올 오래된 건물 벽면에 건물의 히스토리를 소개하는 미디어 파사드(Facades)가 영화처럼 펼쳐진다.
몬트리올 시내를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문구가 ‘Je me Souviens(나는 기억한다)’다. 대부분의 자동차 번호판에도 작게 표기돼 있다. 1759년 세인트로렌스강변 에이브라함 평원에서 영국 제국에 패한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자 그때부터 "퀘벡인들이여!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잊지 말자"란 뜻에서 이 같은 문구가 사용됐다고 한다. 몬트리올 원도심에 위치한 붉은색 벽돌의 역사박물관(Centre d’ historie de Montreal)에 가면 이들이 그토록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이들 중 상당수는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 퀘백주를 분리 독립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다음 날 만나기로 한 미셸은 시청으로 바로 출근하지 않고 멀리 한국에서 온 기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ACM(At-eliers Creatifs Montreal) 본부가 있는 피에카레(Pied Carre)부터 들렀다. 시청까지 차로 20여 분 걸리는 거리를 그는 교통 체증 때문에 자신이 직접 스쿠터를 몰고 왔다. 시 국장급 간부가 직접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참고로 몬트리올의 거리와 공원 명칭은 대부분이 지역 출신 예술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셸은 전날 기자와의 약속을 미룬 것이 미안했는지 ACM 대표인 질 레노드(Gilles Renaud)에게 아틀리에 안내도 부탁해 줬다.

▲ ACM이 운영하는 예술가들의 공동작업 피에카레를 이곳 갤러리장인 랑리 스벙만(Larry Silberman)가 안내하고 있다.
비영리 민간기구인 ACM은 2007년 몬트리올 시정부 지원을 받아 출범했다. 지금은 3만제곱피트(약 10만㎡) 공간에 작업실 300개를 만들어 지역의 예술가 700여 명에게 제공하고 있다. 싼 임대료를 찾아 공장지대로까지 밀려 왔던 가난한 예술가들이 더 이상 쫓겨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운 좋게도 ACM이 운영하는 여러 예술가 작업 공간 중 가장 큰 피에카레의 내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했던 이곳 작업 공간을 갤러리장 랑리 스벙만(Larry Silberman)이 우리에게 만큼은 처음 문을 열어 줬다. 그의 우호적인 태도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비하고 예술가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를 적극 지지한다는 뜻으로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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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피가드·질 레노드 인터뷰

몬트리올시 외곽에 위치한 피에카레(Pied Carre)에서 시 공연예술부장을 맡고 있는 미셸 피가드(Michele Picard, 왼쪽)와 비영리 민간기구 ACM(At-eliers Creatifs Montrea)의 대표 질 레노드(Gilles Renaud)를 만났다.

미셸은 앞서 몬트리올시의 도시재생 정책을 담당한 바 있다. 피에카레는 ACM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1시간 넘게 진행된 이들과의 인터뷰에서 몬트리올시가 활기 넘치는 도시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몬트리올 시정부에서는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해 공공예술 분야 지원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공정성을 위해 ACM과 같은 민간기구가 참여하는 예술위원회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곳 예술가들도 매년 시 주체로 열리는 콩쿠르(concours)에서 작품이 선정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삼는다. 선정된 작품은 도심 공원과 대형 건물에 의무적으로 설치될 뿐 아니라 인근 거리는 해당 예술가들의 이름이 붙여진다.

이처럼 몬트리올이 프랑스 파리 못지않은 예술의 도시가 된 것은 불과 몇 년이 안 된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가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많은 예술인들이 비싼 임대료를 내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이후 2007년부터 몬트리올 시정부 주도로 ‘상상하라-실현하라’란 모토로 적극적인 문화지구(Les Quartiers Culturels) 사업을 펼쳐 왔다. 예술인들이 입주해 있는 건물은 최소 5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했으며, 시정부에서도 1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2만㎡에 달하는 작업 공간을 매입하고 예술가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게 했다.

문화지구 내 작업 공간의 연평균 임대료는 1제곱피트당 12달러(캐나다달러)로, 76㎡ 크기 작업실의 연 임대료가 1천만 원을 넘지 않는다. 민간기구가 운영하는 피에카레의 경우 이보다 더 싼 1제곱피트당 10달러 수준이다.

특히 피에카레에는 활판 인쇄술이 처음 상용화되던 해 프레스(press) 기기부터 개인이 구입하기 힘든 고가의 인쇄기기들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시각디자인 분야 아티스트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만 70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300여 곳의 작업실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창작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받는다.

미셸과 질은 자신들의 가장 큰 책무가 이들 아티스트가 도시를 떠나지 않고 맘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아티스트가 곧 ‘도시의 자산’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몬트리올=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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