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마을 어귀에 심어진 탱자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 솔방울과 함께 전쟁놀이를 한 적이 있다. 마치 성능 좋은 수류탄인 양 적진을 향해 힘껏 던지며 놀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동네 어른들한테 들켜 혼쭐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탱자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귀한 열매일지 몰라도 단단한 껍질과 너무 신맛에 자라면서 단 한 번도 과일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탱자탱자 놀아서 쓰겠느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탱자나무 열매는 쓸모없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 탱자나무를 신줏단지 모시듯 귀하게 여기는 곳이 있어 찾아가 봤다.

인천시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 135-10번지에 위치한 수령 400년 된 탱자나무다.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돼 열매가 익을 때면 동네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기도 할 정도다.

# 열매 하나도 함부로 따지 말라

▲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 135-10번지에 위치한 탱자나무
강화 초지대교를 건너 해안도로를 따라 마니산 함허동천 쪽으로 가다 보면 조선시대 문신인 이건창(1852~1898) 생가가 나온다.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진 단조로운 ㄱ자형 초가집의 모습이 굳은 절개의 옛 선비 모습을 닮았다.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해주 감찰사를 지낸 선생의 생가 맞은편에 높이 4m, 밑둘레 1m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탱자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400년 긴 세월을 버틴 나무치고는 그 크기와 모양이 볼품없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탱자나무가 마을은 물론 나라를 구한 장수인 양 지극정성으로 떠받든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한용자(62·여)씨는 "탱자나무의 열매가 노랗게 잘 익을 때는 늘 마을에 풍년이 왔다"며 "마을의 길흉을 점치는 신령한 나무"라고 했다.

한 씨는 지금도 탱자나무가 있는 길가에서 찐 옥수수를 비롯해 재배한 호박과 나물 등을 팔며 행여 누군가 탱자나무 가지를 훼손하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다. 오래된 탱자나무 가지는 나쁜 기운을 막고, 9월이면 노랗게 익어 가는 열매는 향이 좋아 가지째 꺾어 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탱자나무 주변에 마을 사람들이 무궁화를 심어 나무 자체가 길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나무 주변에 울타리가 쳐 있고, 천연기념물 표지가 버젓이 있는데도 길가에 차를 세운 채 자루 한 가득 열매를 따 가기도 한다고 한 씨는 말했다. 최근 탱자나무 열매가 겨울철 감기 예방과 함께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는 건강기능식품으로 각광받고부터다.

# 나라를 지킨 국토 방위의 유물

▲ 천연기념물 지정을 알리는 표지석에 한글로 적힌 '탱자나무'글씨가 인상적이다.
한 씨가 좌판을 벌여 놓은 평상에 이건창 생가 관리인인 김 씨 아저씨가 찾았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알 필요 없다며 말수를 아끼던 김 씨도 탱자나무 이야기가 나오자 참았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김 씨에 따르면 탱자나무가 지금보다 예전에 엄청 크고 열매도 많이 열렸다. 이건창 선생의 6대 할머니가 낙향 기념으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수령이 그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분이 왜 탱자나무를 집 앞 뜰도 아닌, 길 건너에 심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원래 강화도 탱자나무는 고려 때 몽고의 잦은 침입으로 고종이 개경을 버리고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외적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심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탱자나무 줄기에 난 가시가 외적의 접근을 막아 줬기 때문이다.

당시 강화 성벽 바깥에는 탱자나무가 빼곡히 심어졌지만 이후 정묘호란(1627년) 등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성벽 주위의 탱자나무는 훼손되거나 뿌리째 뽑혀 대부분이 고사됐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탱자나무가 이곳 사기리 탱자나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 78호로 지정된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유일하다. 두 나무 모두 수령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심은 ‘국토 방위’의 유물인 셈이다.

#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나무

이곳 탱자나무의 가지는 원래 동서남 세 갈래로 길게 가지를 뻗어 용틀임하듯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었다. 지금은 서쪽 가지가 말라 죽어 두 개의 가지가 힘겹게 서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 탱자나무 열매는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 간다.
그러나 그 밑에 여러 개의 너럭바위는 아직도 지나는 행인의 고단한 다리를 쉬어 갈 수 있게 한다. 얽히고설킨 가지가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막을 만들기 충분하다.

지금도 매년 봄이면 잎보다 흰 꽃이 먼저 피고, 가을이면 노랗게 열매가 익는다. 귤이나 유자처럼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지만 옛 조상들은 그 껍질을 말려서 해열제나 이뇨제 등에 유용하게 썼다.

또 험상 궂은 가시는 울타리를 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외적은 물론 나쁜 기운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무의 모습이 추상 같은 기개로 탐관오리를 벌하고, 굶주린 백성들의 구휼에도 힘썼던 이건창 선생의 생전 모습과도 흡사하다.

통일을 염원했던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87)옹의 생가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보면, 모진 외세에도 질긴 생명력을 견뎌 낸 탱자나무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질 정도다.

이 때문일까.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탱자나무는 각별하다.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자갈을 깔아 보호하고, 밭에 난 잡초보다 나무 주변의 잡초 제거에 더 신경을 쓴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 낸 영검한 나무 탓에 마을이 융성하고 자손이 번창한다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를 가리키는 표지석에 한글로 ‘탱자나무’라 쓴 것이 마냥 정겹게 느껴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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