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는 늘 푸르다. 특히 비 갠 뒤 촉촉함을 가득 머금은 소나무는 그 색이 배어날 정도로 푸르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천년송’이라 불리는 그 나무가 그렇다.

수천, 수백의 병사를 거느린 듯 빼곡히 둘러선 나무들 사이에서 유독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선 모습에서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녹색의 기운을 사방에 흩뿌리며 천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한곳을 지켜 왔을 천년송은 나무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의 나무

▲ 장촌 천년송 가지 사이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보인다
우리나라 재래종 소나무(적송)의 또 다른 이름은 ‘조선 소나무’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겉껍질과 곧게 뻗은 가지, 사시사철 푸른 잎은 장수의 늠름함과 선비의 절개를 닮았다.

그런 소나무가 육지에서 배로 반나절은 가야 닿을 수 있는 백령도에 지천인 이유는 뭘까.

백령도에 대한 옛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섬 모양이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곡도(鵠島)’라 불렸다. 신라 진성여왕 때 당나라로 가던 사신이 풍랑을 피해 곡도에 10여 일 머문 기록이 있고, 후삼국시대에는 당나라로 통하는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지로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태조 때 명장이던 유금필 장군이 무고를 당해 곡도로 유배를 왔었고,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서 이 섬의 이름이 지금의 ‘백령(白翎)’으로 개명됐다. 공양미 300석에 팔려간 효녀 심청이도 당나라 선원들에 의해 백령도 인근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이 밖에 고려의 충신 이대기가 쓴 「백령지」에는 이 섬을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은 분단된 땅의 최전선에 위치해 때 묻지 않은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만을 놓고 볼 때 백령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우리 조상들이 이 섬에 소나무를 심고 가꾼 것도 아마 이곳이 우리 영토임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장촌의 비밀

백령도 용기포 선착장에서 차로 20여 분 가다 보면 관광명소인 ‘콩돌해안’에 조금 못 미쳐 ‘장촌(長村)’이란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메밀칼국수 집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한 장촌에 천년송이 있다.

마을 큰 길가에 장촌경로당을 뒤로하고 산등성이를 따라 10여 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선 천년송을 만날 수 있다. 인천시가 2000년 4월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천년송은 400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때 마을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표지석에 새겨져 있다. 보호수 지정 당시 나무의 높이는 15m, 가슴높이 둘레는 2.9m다.

기껏해야 조선 왕조와 역사를 같이 했을 나무가 ‘천년송’이라 불리는 까닭은 천년 동안 마을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곳 섬 사람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장원식(74)씨는 "천년송은 나주(羅州) 장(張)씨 문중 선산을 지켜 온 보호수로, 조선 선조 때가 아닌 고려말 심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곳 장씨 문중의 13대 손인 그는 "고려말 내관(內官)을 지낸 선조께서 임금님이 정해준 배필을 정배(正配)받아 이곳에 정착해 자손을 낳았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천년송의 수령은 족히 600년 이상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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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 장촌 천년송이 푸르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내관이었던 그의 선조가 어떻게 자손을 낳아 번창했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장 씨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건넛마을 진촌(현재 두무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고, 고려시대 당나라 군사들이 말을 키운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키운 흑염소로 만든 엑기스가 지역 특산물로 팔리고 있다.

# 천년의 소원

백령도 장촌은 예전부터 장씨 집성촌이었다. 장 회장이 어릴 적만 해도 장촌에만 ‘큰집’, ‘작은집’이라 불리던 장씨 문중 24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지금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그의 어릴 적 기억에는 백령도에 들어와 살기 위해선 장씨 문중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백령도에만 3천147가구 5천63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여기에 주둔해 있는 해병대까지 포함하면 여의도 면적에 17배 크기의 섬에 1만 명이 넘게 상주해 있는 셈이다.

장 회장은 늘 같은 모습으로 선산을 지키고 선 소나무는 자신의 할아버지 세대 그 이전부터 ‘천년송’이라 불렸다고 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지금은 그저 효심 가득한 딸로 비춰질 수 있지만 예전 백령도에선 누군가 언제든 바다에 제물로 던져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백령도는 전장의 최전선에 있다.

장 회장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 아직 못다 한 조상 묘에 대한 벌초를 끝내야 할 근심보다 천년송 주변에 무성히 자란 넝쿨과 잡초를 제거하지 못한 걱정이 더 크다.

그는 "올 추석에 육지로 나가 사는 자식들과 친인척들이 모이면 성묘 가기 전에 (천년송 주변에)꼴부터 베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노송을 돌보는 장 회장의 마음처럼 천년송 역시 천년의 세월을 한곳에서 묵묵히 버텨 줬고, 앞으로도 천년을 더 그렇게 마을의 수호신이 돼 줄 것이다.

그리고 올 추석 고향을 찾을 장씨 문중도 조상의 묘를 찾아 제례를 지낸 뒤 늘 그 자리에 있던 천년송에게 똑같은 소원을 빌 것이다.

백령도=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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