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넘는 세월을 인고한 그리움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그토록 오랜 기간 살아내야만 했던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천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뱃길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섬 볼음도. 강화나들길 제13코스인 이 섬을 걷다 보면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옴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추정되는 나무의 나이는 약 800살. 높이 24m에 가슴높이 둘레는 8.96m로 어른 다섯이 팔을 벌려도 다 감싸 안지 못할 정도다. 천연기념물 제304호인 볼음도 은행나무를 주민들은 ‘할아버지 나무’라 부른다. 그가 살아온 오랜 세월만큼이나 애틋하고 기이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추석 명절을 앞둔 지난 주말 볼음도를 찾았다. 조선후기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출전과 망명, 수차례 투옥을 번복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임경업(1594~1646년)장군이 풍랑을 만나 이 섬에 머무는 동안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해서 지금의 ‘볼음도’라 불리는 섬이다. 저어새 등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로도 유명한 볼음도는 섬 전체가 나들길(13㎞)로 조성될 만큼 해안가 기암괴석 등 볼거리가 많다. 그 중에서도 나들길 중간에 정자나무 구실을 하는 은행나무는 이 섬을 찾는 이방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 할아버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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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은행나무가 ‘할아버지 나무’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이 마을 주민들은 할아버지 나무를 ‘기원목(祈願木)’이라 여겨 매년 정월 그믐날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풍어제를 지냈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접경지란 이유로 출어가 금지되자 더 이상 풍어제를 올릴 이유도 사라졌다. 이후 마을에 큰 교회가 들어서면서 마을 사람들도 더 이상 할아버지 나무를 섬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수 마을 주민들은 나무의 영검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금도 마을 주민 상당수는 나무의 가지를 다치게 하거나 부러진 가지를 태우면 목신(木神)의 진노를 사서 재앙을 받게 되고, 끝내는 죽게 된다는 전설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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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할아버지 나무의 고향은 볼음도가 아니다. 이곳에서 약 5㎞ 떨어진 황해남도 연안군 온천면 호남리다. 고려시대 태풍과 큰 홍수로 할머니 나무만 남겨 두고 남편이던 할아버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를 표류하다 볼음도까지 떠밀려 온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바다 건너 할머니 나무가 보이는 해안가 언덕 위에 할아버지 나무를 정성스럽게 심었다. 지금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할아버지 나무와 부부의 연을 맺은 북녘 땅의 할머니 나무를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남북이 갈라서기 이전 볼음도와 호남리 주민들은 서로 왕래하며 나무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해마다 생이별한 이들 부부 나무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한 대동제를 번갈아가며 지냈다고 한다.

# 망향가

이곳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윤호(81)옹은 달이 차고 파도가 잔잔해지면 나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 나무의 슬픈 망향가다.

"은행나무는 원래 암수가 다르잖아. 할바이 나무 허리춤 아래 커다란 거시기 보이지? 저게 남근이야. 그리고 저 바다 건너 보이는 것이 할마이 나무여. 수백 년 세월이 지나도 부부가 떨어져 살아야 하니 가심(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어. 빨리 통일이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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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사투리가 남아 있는 그의 말투에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 고향을 그리워할 할아버지 나무의 애절함이 묻어났다.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연신 사진만 찍어대는 이방인에게 이 같은 할아버지 나무의 심정을 전하고 싶었는지 그는 마을 어귀부터 사발이(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취재진을 뒤따라왔다. 방금 밭에서 캔 햇땅콩을 건네며 그는 자신이 어릴 적 본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할아버지 나무에서는 지금도 고요한 밤이면 ‘우~웅’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몸통에 생긴 커다란 구멍 안에 둥지를 튼 뱀이 우는 소리란 얘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썩은 부위를 도려낸 뒤 인공수피를 덧씌우는 외과 수술을 받은 터라 뱀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나무가 우는 소리는 실제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김 옹과 같은 마을 주민들은 이 소리를 할아버지 나무가 들려주는 ‘망향가’로 여긴다.

# 기이한 생김새

은행나무는 원래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정도로 지구상에 가장 오래된 나무다. 대부분의 은행나무가 비슷한 모양이지만 볼음도 은행나무는 유독 특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나무처럼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줄기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닮았다. 보는 방향에 따라 화난 듯, 웃는 듯 보인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수만 가지 표정을 짓는다. 십 리 밖의 아내를 수백 년 그리워했을 나무의 모진 운명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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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건 거목의 특징으로 여기지는 유주(乳株)의 모습이 할아버지 나무에서는 마치 남성의 생식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유주의 모습은 젖꼭지 모양을 닮아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여인이 만지면 아이가 생기고 젖이 잘 나온다는 미신이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 나무의 유주는 그 크기도 놀랍지만 여러 개가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보인다.

김 옹은 "나무의 유주가 예전에 저렇게 많지 않았는데, 근래 많이 늘었다"며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남북의 대치 국면이 심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을 나무도 아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 역시 올 추석 육지에서 찾아올 자식들이 행여 오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올 가을 또다시 노랗게 은행잎을 물들이고 있을 볼음도 할아버지 나무를 찾아 그가 들려주는 망향가를 들어봄은 어떨까.

지건태 기자 jus216@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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