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각 마을마다 ‘신체(神體, 신성한 물체)’로 모시는 큰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마을의 가장 큰 나무를 우선 찾았다.

꼭 명절 등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정성스레 소원을 빌면 그 나무가 힘을 줄 것이라 믿었다.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 자리잡고 있는 나무도 그러했다. 유구한 세월 속에 주민들의 안식처였던 구월동 회화나무다. 500여 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민들의 버팀목이 돼 왔다.

# 귀신 쫓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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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린다. 이는 중국 주나라 선비들의 무덤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에서 비롯됐다. 부모들은 과거시험 합격 등 자식의 학문적 성과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집에 회화나무를 심어 기르곤 했다. 학업 뿐 아니라 회화나무는 가문의 번창을 가져다 주는 ‘길상목(吉祥木)’이었다. 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우리나라에도 성균관이나 성주 향교 등 유교와 관련된 유적지에서 어렵지 않게 회화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학자수보다 더 잘 알려진 회화나무의 별명은 ‘귀신 쫓는 나무’다. 고고한 이미지의 ‘학자수’와 상반될 법도 하지만, 실제로 회화나무의 한자 표기는 괴화(槐花) 나무다.

‘괴(槐)’자는 홰나무를 뜻하는 한자로, 나무 목(木)자와 귀신 귀(鬼)자를 합친 것이다. 이는 예전부터 사람이 많이 사는 집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 이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중국 발음과 비슷한 ‘회화’로 부르던 것이 그대로 굳어져 회화나무가 된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궁궐에도 귀신을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심어 두곤 했다. 대표적인 예는 창덕궁 돈화문 안에 있는 회화나무 군(群)이다. 이곳에 있는 수령 300∼400년짜리 회화나무 8그루는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지금도 구월동 회화나무를 찾는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회화나무 역시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염원하고 귀신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심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구월동 당산나무

구월동 회화나무 관리를 맡고 있는 남동구에 따르면 이 나무의 수령은 500여 년이다. 근원 직경은 6m, 높이는 30.5m에 달한다.

남동구는 이 나무가 노거수(老巨樹)로서 보존 가치가 있기 때문에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고 말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1982년 9월 29일로, 35년째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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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아시아드 공원으로 새로 조성된 구월동 771-1. 뒤편에 가장 크고 높이 솟아있는 나무가 회화나무다.
하지만 남동구에서조차 이 나무가 정확히 언제 심어졌는지, 누가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알려진 회화나무의 의미대로 당시 이 지역 사람들도 신성한 나무로서 회화나무에 의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얘기로는 구월동 회화나무는 매년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당산나무였다고 한다. 구월동 회화나무가 위치한 구월1동 771-1 번지 일원은 과거 ‘전재울’ 마을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재주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재주꾼이 많은 마을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 동네 사람들은 과일이나 음식 등 정성스럽게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를 올렸다.

이 정성 덕분일까, 회화나무가 가진 힘 때문일까. 실제로 이 회화나무의 정기로 이 동네에는 불구자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과거 전재울 부락이었던 이 곳에는 현재 구월 아시아드 선수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또한 회화나무 일대는 현재 인천 아시아드 공원으로 조성돼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변모했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45개 국가의 국기가 게양된 만국 광장, 자원봉사자 등 대회를 위해 힘써 준 사람들을 위한 영광의 길, 진달래 동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500여 년 간 이 자리를 지킨 회화나무 주변은 ‘회화나무 동산’으로 따로 조성됐다.

# 앞으로도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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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나무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구월동 회화나무.
공원과 아파트가 새로 들어섰기 때문인지 아쉽게도 현재 회화나무 주변에는 오랫동안 이 나무를 지켜봐 온 이도, 이 나무의 의미를 원래부터 아는 이도 찾을 수 없었다. 인천 아시아드 공원의 가장 높은 동산에서 회화나무만이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변함없이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회화나무 동산은 이 공원을 찾는 주민들에게 꼭 들러야 할 장소다. 원래부터 이 나무를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책이나 인터넷에서 회화나무의 의미를 충분히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동구 역시 회화나무 동산에 이 나무의 의미를 적은 안내판을 설치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 수 있도록 해 놨다. 공원에 산책하러 올 때마다 이 동산을 찾는다는 김성태(61) 씨는 종종 이 나무에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김 씨는 "적어도 인근 주민들에게는 이 나무가 아주 유명하다"며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가는 데, 나무 주위에 설치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사과 등의 과일을 차려놓거나 돈을 놓아두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전재울 부락이 있었을 때처럼 주민들이 회화나무를 바로 곁에 두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나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 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에게 회화나무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더라도 이곳을 지켜주는 ‘신체’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보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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