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행정학박사.jpg
▲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생할 수 없으니 상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생이 서로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상생이 돼야 하고, 그러려면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해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귀하게 여긴다고 느낄 때, 저는 마음을 기꺼이 엽니다. 그러니 상대방도 제가 그를 귀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들 때, 저처럼 마음을 열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아름다운 상생이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주지 스님이 여러 동자승들 중에 무척이나 아끼는 동자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자승은 생김새도, 또 머리도 신통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요. ‘왜 저리도 못나고 멍청한 녀석을 큰스님이 좋아하냐?’고 말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주지스님 역시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주지스님은 모든 동자승들을 불러 모은 뒤에 자그마한 새를 한 마리씩 나눠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너희에게 나눠준 새를 죽인 후, 그 주검을 갖고 오너라. 그것을 보고 내가 너희들 중에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인지 결정하겠다."

 제자들은 식은 죽 먹기란 식으로 웃으며 모두들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제자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나타납니다.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죽은 새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든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자승만 보이질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자승을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제껏 오지 않는 걸 보니, 틀림없이 도망친 게 분명해."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주위가 어두워졌을 즈음에 동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아직도 살아서 ‘짹짹’거리는 새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동자승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고 풀이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지스님은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동자승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왜 그 새를 아직도 살려두었느냐?"

 동자승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합니다.

 "스님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다녀보아도 그런 곳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크게 웃었습니다. 바보라는 듯이 빈정대면서 말입니다. 스님이 또 물었습니다. "누가 네 뒤를 밟기라도 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누가 너를 보고 있었느냐?"

 "제 자신이 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절 마당에 있던 모든 승려들은 말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 동자승을 비난하고 놀려댔던 제자들은 그 말을 듣는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겁니다.

 후계자가 되려고 미안함이나 죄의식이 없이 살아 있는 새를 죽여 버린 다른 제자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봅니다. 늘 주위를 내 성취의 수단으로 여기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를 돌아봅니다. 그곳에 아름다운 상생은 애초부터 없었을 거란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동자승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살아왔지만, 그 마음의 깊이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내어줄 줄 아는 소년이었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상생을 하는, 그래서 너와 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지혜를 이미 소년은 가졌던 겁니다.

 요시노 히로시 선생의 시로 이 귀한 시간을 정리해봅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결이 안 되는 만들어짐의 과정. 꽃도 암꽃술과 수술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벌레나 바람이 찾아와 암꽃술과 수술을 연결하는 것. 생명은 제 안의 결여를 안고 그것을 타자가 채워주는 것."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